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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사유의 시선 - 부족한 논거와 지나친 단순화


읽기 전에는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컸었다. 토론 모임에서 함께 읽고 토론할 책으로 선정이 된 이후에 인터넷에서 책에 대한 후기와 저자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책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해주었으며, 저자 역시 세상을 변화시킬 새로운 학교의 설립을 위해 20년간 재직했던 유명대학 교수직을 박차고 나온 이력으로 인해 많은 존경을 받는 분이셨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읽는 도중에 그리고 읽고 나서도 실망이 컸던 책이다. 물론 이 책의 주요 메시지인 사유 행위로서의 철학라던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를 위한 필요한 자세들이 규정된 철학적 시선의 정의에 대해서는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의 전반적인 서술 과정 대부분은 논거의 부족과 논리적 비약을 드러내고 있어서 동의하기 힘들었다. 또한, 그 논거의 부족과 편협한 해석들도 대부분 낡은 식민사관이나 문화사대주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 저자가 이야기하는 철학적인 사유의 시선이 과연 좀더 나은 사고를 하는데 있어 어떤 효용성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먼저 책의 전체적인 구성을 살펴보자. 책은 일반적으로 장이 아닌 강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아마도 이 책의 기본 골격은 강의안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체 5강으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1강에서 4강 까지가 실질적인 책의 내용이고, 마지막 강은 질의에 대한 저자의 답변들이 담겨있다. 1강 부정에서는 앞서 언급한 철학은 살아있는 사유이고 행동이라는 주장으로 시작해서, 중국 근대사를 예로 들어 문화, 사상, 철학의 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2강 선도에서는 철학적인 시선을 갖추어 선도와 창의력을 발휘해야 선진국으로 도약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3강 독립에서는 베이컨이 이야기하는 우상들에서 벗어나 니체가 이야기하는 독립적 주체로 관찰과 몰입을 통해 세상의 현상들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4강 진인에서는 다시 한번 극장의 우상에서 벗어나 덕을 통해 자신을 이겨내어 지성을 완성시켜나가자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나마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고 있는 철학을 공부의 대상으로 삼지말고 철학이라는 행위를 해야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지금 이 시대에 철학을 단순히 철학 이론들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보다 합리적인 철학적인 사고를 위해, 보편타당한 철학지식의 체계를 세우기 위해 철학 이론들을 공부하는 것이지 않을까? 적절한 지식 기반 없이 사고의 과정에 뛰어들게 되면 철학을 했다는 나름대로의 정신승리는 이룰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사고 결과의 수준은 자못 뻔하다고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철학 이론 습득의 과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현실일 수 있다. 나 역시도 그 범주를 벗어나고 있지 못한다. 하지만, 저자가 표현하듯이 그것이 훈고적, 후진적 이며 낮은 시선이라 극단적인 평기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좀더 합리적인 철학이라는 행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한편 철학이라는 행위를 해야한다는 주장 자체가 참신한 것은 아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신기관에서 철학적 사고에 방해가 되는 우상들을 벗어나기 위해 과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과학적인 방법론을 면밀히 따져보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행위로서의 철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저자가 정의하는 철학적 사유의 시선들을 구성하는 요소들도 시라토리의 “니체의 말"이라는 책을 보면 대부분 니체가 이미 언급했던 내용들이다. 저자가 책에서 베이컨이나 니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할지 난감하다. 저자가 수십년간 유명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셨다고 하던데, 베이컨이나 니체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믿기가 힘들다.

일단,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저자의 주장들에 논거의 결핍, 논리적 비약, 그리고 관념적인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 있다. 읽다가 보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주장들이 너무 많아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토론 모임을 해야한다는 의무감이 없었다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1강과 2강에서 언급되는 중국, 일본, 한국의 근현대사 분석 부분이 가장 답답했다. 중국과 일본은 높은 수준의 철학적 시선을 가져 선진국의 길을 갈 수 있었고, 한국은 낮은 수준의 철학적 시선으로 인해 식민지를 거쳐 아직 선진국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그렇다쳐도, 중국은 언제부터 선진국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중국은 철학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당시 최신식 철학인 마르크스 주의를 채택해서 결국은 선진국이 되어간다고 이야기한다. 철학에 대한 갈망으로 중국이 마르크스 주의를 채택했었겠는가?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자. 그럼 비슷하게 마르크스 주의를 수입한 북한과 베트남은 왜 아직도 선진국이 되지 못했는가? 한편, 중국이 수준높은 철학적 시선을 가졌다고 저자가 평가하는 것도 어느 한 도사(도교의 성직자)와의 대화로부터 기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의 수준높은 철학적 시선을 입증하는 다른 논거들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저자는 우리나라의 현재 상태가 수준 높은 철학적 시선을 가져보지 못하고 남의 것을 무작정 베끼기만 하는 선진국의 문턱에서 방황하는 중진국이라고 이야기한다. 앞서 이야기한 근대사 부분에서 조선 시대를 낮은 수준의 철학으로 규정짓고,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사도 역시 수준이 낮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에게 묻고 싶은 것은 수준의 높낮이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성공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면 수준 높은 철학적 시선인 것이고, 선진국이 되지 못하면 수준이 낮은 것인지 묻고 싶다. 개인적인 근현대사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 19세기까지 조선은 나름대로의 철학적인 시선으로 국가를 유지했으나 서구 열강의 야만적인 제국주의 침탈로 인해 신민지화가 되었다. 그 안에도 실학운동이나 계급운동과 같은 높은 수준의 철학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세계 정세는 제국주의의 야만적인 현실이 보다 높은 수준의 철학적인 움직임을 삼키어, 조선은 식민지 종속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나름 발전을 위해 다양한 철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고, 그 결과로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국가주의, 전체주의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이 사회 내부에서 채택되거나 논의되어 왔었다. 유래 없을만큼 다양한 사상들의 충돌 자체만으로도 이미 수준 높은 철학적인 활동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이나 분배 위주의 경제정책과 같이 시각을 달리하면서 국가 발전의 동력을 유지하고 발견하려고 노력 중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경제적, 과학적, 군사적으로 발전을 하고 있으며, 더불어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도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직은 전반적으로 선진국이라 자부하기에는 이르지만, 특정 분야에서는 이미 선진국의 반열에 이르고 있다고 본다. 솔직히 발전의 원동력은 수준높은 지식 기반을 바탕으로 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경제력과 군사력의 성장이지 않을까 싶다. 중국도 마찬가지이고, 일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를 주도한 유렵도 그랬을 것이고, 미국도 동일한 이유로 패권을 차지했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그토록 주장하는 선진국이 되기 위해 발휘해야하는 창의성의 문제에도 이견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총균쇠에서 창의성의 발현은 창의적인 사람들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제반 환경과 그 창의성의 결과물들을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사회구조에 있다고 했다. 나는 이런 견해에 동의한다. 저자가 이야기하듯이 창의성의 근간이 되는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치자. 그 사람들이 마음껏 질문을 할 수 있는 학교, 직장이나 단체가 없다면 질문이 창의성으로 연결이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저자의 주장대로 높은 수준의 철학적인 시선으로 창의성이 발현되었다고 하더라도 특정 기업이나 단체들이 사회 시스템을 독점하고 있다면 그 창의의 결과들을 제대로 수용이 되지 않을 것이다. 창의성을 요구하지 않는 사회 시스템 안에서 창의적인 인재들을 아무리 많이 양성해봐야 결국에는 그 창의의 결과물들은 사장되고, 그 인재들의 중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창의성을 요구하는 사회, 질좋은 창의의 결과물들이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사회구조가 이루어지면 굳이 창의성을 가진 인재들을 양성하지 않더라도 사회구성원들은 창의성을 획득하기 위해 발버둥을 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지식의 습득과 현실 문제 인식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철학적인 시선의 방법론들은 관념적인 단어들로 구성된 설명이 너무 많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고의 전개 과정에서 보편타당성을 검증하는 부분들이 결여되어있어 저자의 방법론을 택한 사람들은 쉽게 베이컨이 이야기한 우상들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커보인다. 너무 심한 확대 해석 혹은 비약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의 부족한 논거, 편협한 해석, 심각한 단순화들이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관찰, 측정, 실험, 일반화, 시험 및 가설의 변경”으로 구성된 과학적 방법론이 우리의 인식, 가치체계, 자연현상 등을 탐구하는데 적합하다고 믿는다. 그 관점에서 보면 저자의 철학적인 시선은 “관찰, 측정, 실험”의 중요성을 매몰하고 “일반화, 시험 및 가설의 변경”의 중요성만 강조하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 세태가 “관찰, 측정, 실험”에만 몰두하며 “일반화, 시험 및 가설의 변경”에 익숙하지 않아 철학적인 시선이 중요할 수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한가지 명심해야할 것은 필요한 과정을 건너뛰고 섣부른 일반화는 현실과 동떨어지는 실효성이 떨어지는 시험과 가설들을 양산하여 불필요한 사회적인 에너지의 낭비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본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싶지 않았지만, 뜻대로 되는 일은 없는 모양이다. 모임에서의 토론 과정이 심화되면서 이 책에 대한 분석이 심화되어 좀 감정적인 서평이 된 모양이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뚜렷한 관점을 가지고 책을 읽기를 권한다. 관념적인 단어들로 가득찬 저자의 서술과 주장들은 현실성을 가리워서 독자를을 쉽게 현혹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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