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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누가 진짜 괴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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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놀이에 볼트가 박힌 채 으르렁거리는 초록색 얼굴, 번개를 맞고 깨어나 거대한 몸으로 뒤뚱거리며 걷는 괴물.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던 이미지였다. 영화 스틸컷으로 각인된 그 전형적인 몬스터의 모습 때문에, 원작 역시 그저 공포스러운 괴물 이야기일 것이라 짐작해 왔다.

하지만 실제 책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북극을 향해 항해하던 월튼이 누나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되는 액자식 구성, 그리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의 이야기는 공포스럽기보다는 의외로 차분하고 사색적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우리가 괴물의 이름이라 여겨왔던 ‘프랑켄슈타인’이 사실은 창조자의 이름이며, 정작 괴물은 이름조차 없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세 개의 부로 나뉜 이야기에서 창조자와 피조물이 각각 화자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은, 괴물을 단순한 가해자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들었다.


“천체들의 경이로운 광경은 분명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고독 속에 있는 거잖아.”


이야기 초반, 미지의 세계를 향한 월튼의 이 말은, 이 소설이 단순한 괴물 이야기가 아니라 탐구와 창조, 그리고 그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인간의 고독을 다루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그리고 책장을 넘길수록 확신하게 됐다. 이 이야기에는 내가 알던 ‘괴물’은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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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환희가 아닌, 배신으로 시작된 이야기

〈프랑켄슈타인〉의 중심에는 야심 찬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있다. 그는 오랜 열망 끝에 생명을 창조하지만, 그 존재가 눈을 뜨는 순간 흉측한 외모에 압도되어 곧바로 도망친다. 창조의 기쁨은 찰나였고, 남은 것은 공포와 회피뿐이다. 과연 그는 과학을 사랑했던 탐구자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이름을 위대한 창조자로 남기고 싶었던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이었을까.


“천지창조 이후 최고의 현자들이 탐구하고 바랐던 바가 이제 내 손안에 있었던 겁니다.”


이 고백에서 느껴지는 것은 순수한 탐구의 기쁨보다는, 인류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도취감과 자기 과시욕이다. 그가 창조의 과정에 몰두했던 이유 역시 생명 자체에 대한 책임보다는, ‘창조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흥분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는 창조물이 눈을 뜨는 순간 극도의 혐오감을 느끼며 도망치는 장면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자신이 만들어낸 존재와, 그로 인해 발생할 결과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빅터가 창조물을 ‘괴물’로 규정하는 기준이 그 존재의 본질이나 가능성이 아니라, 오직 외모에만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그의 동기는 완전히 흔들린다. 결국 그가 사랑했던 것은 생명이 아니라,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자기 자신이 아니었을까.


괴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에서 가장 신선했던 지점은, ‘태어날 때부터 악했을 것’이라 막연히 믿어왔던 괴물에 대한 나의 편견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세상에 눈을 뜬 이야기 속 괴물은 오히려 누구보다 순수했다. 바스락거리는 잎사귀 소리와 지저귀는 새의 울음에 감탄하고 위안을 얻는, 맑은 감성을 지닌 존재였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였지만 그는 드라세 가족을 몰래 관찰하며 언어를 익혔고, 그들의 삶을 통해 사랑과 헌신, 가족의 의미를 배워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생각하고 성찰하며, 때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성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아가 장작을 패고 눈을 치우며 보람을 느끼는 모습은 선의를 넘어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그의 간절한 마음이 보여 마음이 짠했다. 그랬기에 용기를 내어 드라세 가족에게 다가간 순간 맞이한 공포와 혐오는 괴물에게는 더할 수 없는 좌절감을 주었을 것이다. 눈먼 노인만이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을 뿐, 외모를 본 가족들은 즉시 그를 밀어냈다.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그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이 괴물임’을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내면은 인간이지만, 외형 때문에 영원히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그의 고백은 정체성의 비극 그 자체였다.

물론 윌리엄과 엘리자베스, 앙리 클레르발을 죽인 그의 행동은 분명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러나 태어나는 순간 버림받고, 사회로부터 반복적으로 거부당하며, 사랑을 갈구할수록 폭력으로 되돌려 받는 존재가 과연 끝까지 선할 수 있었을까. 이 지점에서 괴물은 타고난 악이라기보다,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처럼 보인다. 이 대목에서 오늘날의 사회를 떠올리게 됐다. 외모와 학력, 배경에 따른 차별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쉽게 누군가를 배제한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오래된 통념과 편견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사회적 거부가 한 존재를 외로움과 고독 속으로 밀어 넣고, 결국 그를 괴물로 만들어가는 과정. 이 질문은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지만, 동시에 이 소설이 쓰인 시대의 현실과 작가 메리 셸리의 개인적 경험과도 맞닿아 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제한적이었던 시대, 그녀는 첫 출간 당시조차 자신의 이름이 아닌 남편 퍼시 셸리의 이름으로 작품을 세상에 내놓아야 했다. 더불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이후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단절을 겪어야 했던 메리 셸리는 사랑받지 못한 존재의 고독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 속 괴물의 외로움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삶에서 길어 올린 감정처럼 느껴진다.


AI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괴물이 빅터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하나, 자신과 함께할 존재였다. 그는 그저 자신의 온전한 모습과 존재를 인정해 줄 동반자를 원했을 뿐이다. 빅터는 처음엔 그의 고통을 이해하는 듯 보였지만, 끝내 여성 괴물을 파괴한다. 그것은 약속 파기이자 또 한 번의 책임 회피였다.

이 장면은 오늘날의 AI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기술의 발전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환영받지만, 그것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고민은 늘 한발 늦게 따라온다. 효율과 수익성에 집중한 채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는 기업들은, 기술이 만들어낼 불평등과 상실, 그리고 그 피해를 누가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쉽게 뒤로 미룬다.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데에는 열을 올리면서도, 그것이 인간의 삶과 노동, 자율성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책임 있는 논의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다. 오늘날의 기술 개발 역시 통제와 책임의 문제를 외면한 채 속도만을 앞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회적 책임’은 더 이상 도의적 요청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의무로서 요구되어야 하며, 그로 인한 피해를 가장 크게 감당하게 될 우리 모두가 이 질문을 끊임없이 그들에게 던지고 공론화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누가 진짜 괴물인가

결국 빅터는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게 만든 괴물에 대한 복수에 사로잡혀 그를 끝까지 뒤쫓지만,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월튼의 배 안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비극의 끝에서도 그는 끝까지 자신을 정당화한다. 괴물을 철저한 악으로 규정하며, 스스로를 피해자의 자리에 남겨두려 한다. 반면 빅터의 죽음을 확인하러 온 괴물은 창조자의 시신 앞에서 울며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인정하고, 그로 인한 고통과 공허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더 이상의 비극을 만들지 않기 위해, 그는 자신의 외로움아 사라질 ‘스스로의 소멸’을 선택한다. 두 존재가 맞이한 마지막은 극명한 대비에서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과연 누가 더 괴물에 가까운 존재였을까. 이러한 메시지는 결국 월튼의 선택에도 영향을 미친다. 빙하에서 탈출한 이후에도 북극을 향한 항해를 계속하려던 그는, 자신의 명예와 꿈보다 동료들의 생명과 두려움에 귀 기울이며 귀환을 택한다. 끝없는 야망 대신 멈춤을 선택한 것이다.

이 소설이 남기는 중요한 메시지들은 분명하다. 누군가를 괴물로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 그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라는 것. 그리고 내가 확신하는 ‘정의로운 길’을 향해 질주하기보다, 때로는 멈춰 서서 성찰을 하며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창조와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며, 그 책임을 끝까지 감당하려는 태도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임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여러 면에서 깊은 사유의 질문을 던지는 <프랑켄슈타인>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임은 틀림없다.


*2025년 11월 넷플릭스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공개되었다. 스토리라인에 각색을 더해 개연성을 강화하고 원작과 다른 결말로 마무리하여, 책과 비교하며 감상해도 흥미롭다. 물론 아름다운 영상미와 몰입감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1 Comment


Void
Void
a day ago

누군가를 괴물로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 그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라는 글귀가 너무나 와닿습니다. 좋은 감상평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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