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 파시스트를 생각하다 -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 바람
- 3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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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휴가로 가우디의 모더니즘 건축이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다녀왔다. 중세 분위기를 간직한 고딕지구를 걷다 산트 펠립 네리 광장에 이르렀을 때, 조용한 광장과 분수, 그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 한가운데서 벽면에 남아 있는 총탄과 폭탄 파편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배경으로 남은 전쟁의 상흔은, 평화와 폭력이 한 프레임 안에서 겹쳐지는 기이함을 만들어냈다.
그 기이함과 함께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와,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다른 나라의 내전에 목숨을 걸고 참전했던 외국인 의용병들이었다. 한때 아나키즘에 관심이 많았고 파시즘을 혐오했던 젊은 시절의 나에게, 그들은 “자유의 의용병들” 같은 이름으로 기억되는 낭만의 끝판왕이었다. 내 조국도 민족도 아닌 곳에서 “저건 내 싸움이기도 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기백이라니. 지금 다시 떠올리면, 그 낭만이란 사실 절망의 다른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번 ‘적’이 만들어지면, 인간은 얼마나 쉽게 폭력을 정상화하는가를 우리는 너무 많이 봐왔으니까.
스페인 내전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사람을 종교·민족·사상 같은 기준으로 갈라 “우리”와 “적”을 만든 다음, 적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기계적으로 정당화하는 비극의 교과서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파시즘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한 번 분류가 끝나면, 그 다음은 너무 쉽다. ‘처리’는 절차가 되고, 절차는 직업이 되고, 직업은 책임을 분산시킨다. 역사 속 비극에서 배운 교훈이 정말 없는 걸까—라는 질문이 여행 내내 떠나지 않았다.

여행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였을까. 나는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에서 파시즘의 흔적을 읽었다. 물론 이 소설은 고전적 파시즘을 직접 다루지 않는다. 다만 폭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누군가를 ‘우리’가 아닌 존재로 규정하고, 그 규정에 기대어 폭력을 절차화하는 방식—은 시대를 넘어 반복된다는 점에서 섬뜩하게 닮아 있었다. 이 세계에서 Nexus-6 안드로이드는 인간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자유를 갈망해 주인을 죽이고 지구로 탈출한 그들은, 인간과 같이 생존을 원하고 두려움을 느끼며 욕망을 가진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공감이라는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을 측정하는 보이트-캄프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존재에게 “퇴역(retire)”이라는 이름의 살해를 부여한다. 한 번 적이라고 판정되면, 죽음은 정의의 얼굴을 쓴다.
고전적 파시즘이 기대는 종교, 국가, 이데올로기 같은 것들은 결국 인간이 역사 속에서 만들어낸 상상된 질서일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라, 사람들이 집단으로 믿는 순간 현실을 조직하는 규칙이 되어버린다는 데 있다. 이 책은 안드로이드를 타자화시키는 기준인 공감, 그리고 그 공감을 존속시키는 일종의 종교 장치인 머서리즘마저 “연출된 것”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폭력의 근거가 흔들린다. 그런데도 세계는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불편한 방식으로 굴러간다. 진위 판단을 넘어 “작동하는 것”이 현실을 만든다는 사실이 남는다.
“Mercer said it was wrong but I should do it anyhow. Really weird. Sometimes it's better to do something wrong than right.” “It's the curse on us,” Iran said. “That Mercer talks about”
— Philip K. Dick,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p.233
폭력이 가장 무서운 순간은 증오가 뜨거울 때가 아니라, 잘못인 줄 알면서도 ‘그래도 해야 하는 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생각은 남아 있는데, 그 생각이 멈춤을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수행을 지속시키는 쪽으로 굴러갈 때—그때 폭력은 더 이상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절차가 된다. 그래서 나는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종교, 국가, 이데올로기가 쉽게 사라지지 않듯, 먼 미래에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사회가 오더라도 ‘인간’이라는 범주를 중심에 두려는 욕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와 “적”이 선명하게 갈라지는 순간, 폭력은 다시 절차와 직업의 얼굴을 쓰고 작동할 것이다. 그래서 책 속에서 안드로이드를 “퇴역”이라는 말로 손쉽게 제거하는 세계가,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다.
내가 더 걱정하는 지점은 안드로이드가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을 갖게 되는 순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오랫동안 반복해온 파시즘의 메커니즘—타자를 분류하고, 비인간화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그들이 학습해버리는 순간이다. 만약 그들이 인간을 “우리가 아닌 적”으로 규정하고, 그 근거와 정당성을 인간의 역사 사례에서 끌어온다면 인류의 미래는 우리가 익숙하게 소비해온 디스토피아 문학과 미디어들이 그린 것보다 더 암울해질지도 모른다. 인간을 적으로 규정하는 안드로이드 파시스트. 섬찍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