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흔히 다윈의 진화론 하면 환경의 변화에 따라 부리 모양을 변화시키며 적응한 갈라파고스 제도의 핀치처럼 생물의 외형적인 변화를 관찰하는 학문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고는 합니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진화론이 유전자의 발견 이후 이를 넘어서, 유전자 풀 내에서 유전자 빈도의 변화를 설명하는 수학적인 토대를 갖추며 어떻게 진보하였는지 보여줍니다. 일례로 도킨스는 5장에서 게임 이론에 바탕을 둔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을 소개하며 자연선택을 통해 이러한 안정된 전략을 가진 유전자들이 유전자 풀을 지배하여 진화를 추동할 수 있는가 설명합니다. 이렇게 도킨스는 유전자가 자연선택의 기본 단위이며 따라서 치열한 생존 경쟁이 일어나는 자연에서 모성애같은 이타적인 행동 또한 설명 가능한지 얘기합니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도킨스가 2장에서 언급한 지구상에 “우연히” 발생한 “자기 복제자”의 존재가 사실은 필연적으로 느껴졌다는 것 입니다. 도킨스는 이러한 우연이 단순한 기적이 아님을 인간이 상상하기 힘든 스케일의 긴 시간과 많은 양의 분자들간 무작위적 상호작용을 통해 설명합니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을때 우주의 방대한 크기와 다양성을 고려하면 자기 복제자의 등장은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아닌 확률적으로 필연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비슷하게도 우연히 발생한 돌연변이 유전자가 어떻게 자연선택을 통해 개체의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를 이끄는것이 필연적인지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주목할만한 것은 앞서 언급한 무작위적 상호작용이 우주의 근본적인 물리법칙을 위배하지 않아야하고, 자기 복제자의 탄생은 이러한 물리법칙 하에 충분히 가능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법칙들이 단순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자연 현상들은 겉보기에 복잡해보이지만, 그 기반에 있는 기초 체계는 단순하고 그래서 아름답다는 것이 현대 물리학자들의 관점입니다. 이를 생각해보면 단순한 구조의 자기 복제자가 복잡한 생물체로 진화하고, 이 과정을 설명하는 자연선택의 이론이 비교적 단순하다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ChatGPT가 등장하고 매년 비약적인 AI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현재에 “이기적 유전자”에서 들려주는 진화생물학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딥 러닝과 신경망은 비교적 단순한 구조와 원리에서 기초하였지만, 이러한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AI는 이미지 분석, 자연어 처리를 넘어 창의적인 결과물을 내놓는 생성 AI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도킨스는 책에서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능력의 진화는 주관적 의식의 진화를 초래한 듯하다”라고 주장합니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뉴런과 이들의 상호작용이 복잡해져 하나의 뇌를 이룰때 의식과 같은 복잡한 현상이 창발(emergence)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I의 발전 역시 이와 같은 창발적 현상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AI 모델의 조절변수가 수천억개 까지 도달하고 연산량이 방대해짐에 따라 AI는 예상하지 못했던 성능 향상이나 새로운 특성의 창발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AI 모델의 개개 구성 요소들의 원리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만, 이렇게 모델의 크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면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연산들은 마치 블랙박스와 같아졌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AI 모델이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설정하고 행동하게 되지 않을지 우려하기도 합니다. AI는 인간이 정한 장기적인 목표를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스스로 단기 목표를 설정하는 시뮬레이션을 거칠 수도 있는데 이러한 학습이 반복되면 좀 더 독립적인 특성이 창발될 수 있지 않을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람의 의식, 그리고 생존본능이 결국 더 많은 복제본을 남기려는 자기 복제자의 단순한 목표에서 시작됐다면, AI 역시 단순하게 설정된 목표로부터 사람과 유사한 본능과 욕구가 창발되는건 불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무작위성에서 진화한 생명체와 사람의 개입으로 발전하고 있는 AI는 많이 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도킨스의 주장대로 신다윈주의의 이론들이 생명체의 진화를 설명하는 전부라면, AI에게서 우연히 의식이 창발하는 것은 필연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