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국가란 무엇인가 / 유시민

  • Writer: Void
    Void
  • Aug 26
  • 6 min read

ree

서평: 국가란 무엇인가 by 유시민


나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름의 명쾌한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어렸을 때 부터 나는 애국심이라는 단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종의 반감이 들었다. 내가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 나는 사고 실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 이익 다툼이나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다른 나라를 배척한다는 말 아닌가? 왜 꼭 그래야 하나? 그냥 다 같이 잘 살 수는 없을까? 애국심보다는 보편적인 '인류애' 같은 단어가 더 좋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다른 종류의 사랑도 마찬가지 아닌가?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 내 애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어떤 상황에서는 타인의 이익을 빼앗더라도 내 가족과 애인을 더 보살핀다는 의미가 되지 않나? 그런데 왜 나는 다른 종류의 사랑(愛) 보다 유독 애국심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까.


대한민국 남자로서 국가의 존재를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강렬하게 느낀 순간은 역시 군대 복무를 할 때였다. 장교로 복무를 했던 나는 입대 면접을 볼 때 제발 '우리의 주적은 누구인가'라는 단골 질문이 안 나오길 간절히 바랬다. 그들이 원하는 '정답'을 외치자니 나를 속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고 '반공심리를 악용하는 정부'라던가 '미국'이라던가 (실제로 미국이 주적이라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때는 그들의 제국주의가 무척 싫었다) 그런 대답을 했다면 아마 늦은 나이로 일반 사병 입대를 감당했어야 했을테다. 예상과 달리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평범한 질문에 "달라이 라마"라는 황당한 대답을 한 나를 (그 당시 달라이 라마의 책을 꽤 감명깊게 읽었을 뿐이다..) 면접관들은 재밌다는 눈길로 팔로업 질문을 했고, 나는 성공적(?)으로 입대 할 수 있었다.


군 복무 중에도 나는, 일종의 정신승리의 차원에서, 그냥 규율이 조금 엄격한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나의 20대는 꽤 반항적이었다 - 물론 머릿속으로만). 보급업무를 담당했기에 실제로 업무도 보고서 작성같은 일반 사무직 업무와 비슷했다. 간간이 있는 군사 훈련, 체력 검정등이 나는 지금 군 복무중이라는 사실을 일깨웠고, 가끔씩 들려오는 북한의 위협적인 움직임들이 좀 더 가까운 신경망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누군가 나를 군복을 입고, 상관에게 경례를 하고, 하급자들을 지휘하게 하게 했다. 눈에 보이는 그 누군가는 상급자였지만, 그 뒤에 국가가 있다는 건 명백했다. 하지만,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그 실체는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 책을 읽었었다면 좀 더 재밌는(?) 군 생활을 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나에게 국가는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되는지 잘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왜 국가가 없이 살 수 없는가, 그리고 잔인하고 냉혹하지만, 국가는 합법화된 혹은 합법적인 폭력이 그 요체임을 나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결국 나의 애국심을 향한 반감의 핵심은 바로 그 폭력성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아무래도 본질이 폭력인 집단을 내가 '사랑'한다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불편했던 것 같다.


니버는 도덕적인 인간이 비도덕적인 집단(국가)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상황을 고찰했다. 나는 아무래도 그 괴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정의롭게 살고 싶은데, 국가라는 차원에서는 내가 원하는 수준의 정의를 구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던 것 같다. 본질이 폭력이었으므로. 이제와서 해보는 내 감정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다.


스스로 진보적 성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나로선, 나라를 팔아먹어도 1번이라는 식의, 소위 말하는 '콘크리트 지지'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이 책은 나에게 인간은 여러가지 본능을 가진 존재이고, 생물학적 본능이 우세한, 즉 본인의 생명과 안위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그들에게 국가는 나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국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하고 그 임무를 지키는 이상, 그들의 폭력성이 크고 작은 '누전사고'를 일으킨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홉스식 국가적 국가론자에게 나라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 나를 지켜주는 보호자이다. 그들에게 전쟁은 아직 우리의 발치에 있고, 나의 이웃은 언제나 나의 안녕을 위협하는 존재로 탈바꿈 할 수 있다. 나는 시대가 변했고, 이제 그런 위협은 우리에게서 꽤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순진한 걸지도 모를 일이다. 누구의 생각이 맞는지 떠나서, 이렇게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홉스식 국가론이 아직 아주 매력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 아무것도 갖지 못한자가 보수적인 성향을 갖느냐는 것도 내가 줄곧 가져왔던 의문이었는데 (한국도 미국도), 베블런의 설명이 매우 잘 와닿았다. 그는 보수는 주어진 사고체계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진보는 새로운 사고습성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가는 활동은 무시 못 할 자원과 에너지가 드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회 (극)빈층은 새로운 사고습성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새로운 사고습성을 제시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다. 결국, 먹고살기 바쁜 와중에 투쟁이니, 계몽이니 하는 것들은 사치라는 이야기이다.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 그들의 가장 효율적인 생존 전략이라는 이야기다. 매우 공감이 가는 설명이다.


진보는 왜 끝 없이 싸우는가. 보수와 싸우고 승리를 거두면 다시 자기들끼리 싸우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베블런의 설명이 여기에도 아주 간명하게 들어 맞았다. 기존의 것을 지키는 자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지키는지 명확한 반면 - 이미 주어져 있으므로 -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자들은 무한히 많은 변화의 방향 중 하나를 설정해 나가야 한다. 진보 1과 진보 2의 방향이 완전이 똑같을 확률은 말 그대로 제로다. 그래서 싸운다. 또 그래서 진보가 진보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연합과 연대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언제부턴가 나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표는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왔지만, 그 표를 던질 때 나는 나는 내가 좋아하는 후보 찍는다 이상의 생각을 해보지 못한 것 같다. 돌이켜봤을때, 내가 던진 수많은 표들중,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 선택이 바뀌었을 경우는 거의 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 마음가짐은 매우 달랐을 것 같다. 예를 들면,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던지면서, 권영길 후보의 선전을 기대했고 응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권영길 후보의 선전은 노무현 후보의 탈락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연합정치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


칸트의 도덕법은 이해하기 참 힘들었지만, 여러가지 예시를 통해 어느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강한 의문이 들었다. 과연 칸트의 도덕법을 엄격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유시민 작가는 칸트 본인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나도 거기에 동의했다. 몇 해 전 유시민 작가가 어느 토크쇼에 나와서 왜 학생운동을 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적이 있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답변이었다. "나는 독재 정권에 맞서 내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 행위를 했다" 어떻게 보면 칸트가 이야기 하는 진정한 도덕법에 가까운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칸트는 나의 행복을 위해 선한 행동을 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선한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그것이 선한 일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만이 진정으로 선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에 비춰 유시민 작가의 학생 시절 학생운동을 한 행위를 생각해보면, 자신의 안위보다는 그것이 옳은 일이었기에 했다는 말은 칸트의 정언명령에 일견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또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 행위를 했다고 이야기 한다. 한 마디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엄이 훼손된다고 생각했기에 그 일을 했다는 것이다. 또 다시 얘기해서,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괴로움에 시달렸을 꺼라는 이야기다.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면 다시 칸트의 도덕법으로 돌아와서, 나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선한 행위중에 진정으로 자신은 전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것이 그저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 과연 있을까? 그 선하다고 생각하는 행위를 하는 것 자체에서 우리는 행복감 - 혹은 불행함을 피하는 것 - 을 느끼지 않나?


이 주제로 토론을 하던 중, 한분이 칸트의 도덕법을 완벽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으나, 그런 '경향성'을 갖는 것은 중요한 것 같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매우 동감했다. 조국 사태를 통해 본 우리 사회는, 특히 보수 사회는, '너는 어차피 완벽히 선해질 수 없는 사람이야 그런데 왜 그렇게 착한 척하는 거야?' 라는 심리를 그대로 드러낸다. '완벽히 선해질 수 없으니 착한 척 하지 말라'는 말은 내게, 인간은 어차피 환경을 파괴하면서 사는 존재 이기 때문에 환경 보호, 기후변화 협약 등은 모두 위선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동의 못하겠다. 내 눈에는 좀 더 선한 사람과 좀 덜 선한 사람이 구별되서 보이고, it matters to me다. 완벽히 착하지 못하지만 조금 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게 올바른 자세 아닐까 생각한다.


칸트의 도덕법을 어렴풋이 이해했지만, 완전히 동의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과연 선험적으로 인식하는 도덕법이라는 게 있을까? 정언명령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이 정한 행동준칙에 의해 살되, 그 행동준칙이 보편적 준칙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주장에서 칸트는 보편적 준칙이 될 수 있는 것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선험적으로 동의되는 것들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과연 그런가? 순수이성 비판에 그 근거를 제시하는지 궁금하지만, 아마 계속 궁금해만 하고 읽진 않을 것 같다.


정치인은 신념윤리가 아니라 책임윤리를 가져야한다는 유시민 작가와 베른슈타인의 견해에 전체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전제 조건이 있다고 생각한다. 신념윤리가 필요 없는 사회여야 한다는게 그 조건이다. 다시 유시민 작가가 토크쇼에서 했던 말로 돌아가보자. 자신이 했던 학생운동이 독재정부를 타도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했다고 이야기 했다. 그게 옳은 일이었으니까. 물론 그는 그때 정치인이 아니었지만, 그와 같은 생각으로 정치를 한 정치인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만약, 정치인은 무조건 책임윤리를 가져야지 신념윤리를 내세워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게 된다면, 그들은 독재정권 하에서 인권유린, 언론의 자유 박탈등의 인간의 기본권 침해에 대해서도 '타협'만 해야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신념윤리 - 즉, 독재타도 - 는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무조건 실패였을 테니까.


우리 모임 토론 중,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비판받는 대표적인 정치인 이완용이 거론되었다. 그의 행적을 보면 그 또한 책임윤리를 바탕으로 을사늑약에 서명하는 결정을 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항쟁을 해서 무고한 피를 흘리는 것 보다 일본에게 선제적으로 협조해서 최대한 피해를 줄이려는 책임윤리적 판단을 했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니 책임윤리를 너무 강조하면, 정치인들에게 자기 합리화의 빌미를 제공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역시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의 갈등은 한국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일상적으로 드러난다.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생각할 때 미쉘 오바마가 했던 말 "when they go low, we go high"라는 말이 떠오른다. 상대가 더러운 정치를 해도 우리는 옳은 정치를 해야한다는 의미를 압축 표현한 이말은 신념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처럼 들린다. 또한 지금 현재 캘리포니아 주지사 개빈 뉴섬이 텍사스의 게리멘더링에 맞서 캘리포니아도 대응하는 게리멘더링을 하겠다고 선언한데 대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신념윤리를 강조하는 입장에선, 타락한 정치(텍사스의 공화당 의원 수를 늘리기 위한 게리멘더링)에 대응하기 위해, 또 다른 타락한 정치(캘리포니아의 민주당 의원 수를 늘리기 위한 게리멘더링)를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비판하고, 책임윤리를 중시하는 쪽에선, 옳지 못한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이상적인 생각은 결국 의회마저 완벽히 내어주고 트럼프의 독재정치를 더욱 더 견고히 하는 '예측가능한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 할 것이라고 옹호한다.


정말 두서없이 생각나는대로 느낀 점을 적어 봤다. 아직 더 배워야 할 것들이 아주 많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머릿속이 많이 정리되는 느낌을 얻었다. 국가는 본질적으로 이런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국가는 이랬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들이 조금 더 구체화 된 느낌이다. 재밌고 유익한 일독이었다. 유익한 토론을 함께 해주신 나란 회원분들께 감사드린다.

1 Comment


유익하게 잘 읽었습니다.👍

Like
  • Facebook

We create a place to
read, write, talk, and think!

 

Cyber Seowon Foundation

admin@cyberseowon.com

A 501(c)(3) with Tax ID: 87-1990819

©2020 by Cyber Seowon Foundation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