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젠베르크 - 부분과 전체 감상문

영문으로는 “물리학과 철학” 혹은 “물리학과 그 넘어에” 라고 변역된 이 책은 노벨물리학 수상자인 하이젠베르크의 자서전입니다. 하지만 독일어 원문 제목을 직역한 “부분과 전체”라는 제목이 너무 근사하고 잘어울린다고 생각되는데요. 왜냐하면 저로써는 물리학하면 떠오르는 수식이 없고, 저자의 전문 분야인 양자론을 이해 할수 있다고 할 수 없고, 설령 대단히 과학적인 내용이 있다 한들 제가 이해할 자신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하이젠베르크란… 미드 브레이킹 배드에서 마약제조 하는 화학 선생님의 가명인 하이젠버그로 밖에 모르는게 저의 지식 수준이거든요.


이 책은 어떻게 저자가 세상에 대한 질문의 씨앗을 심게 되었고, 주변의 벗들과 스승님들로 하여금 어떠한 환경속에서 그 씨앗을 소중히 가꾸고 영양분이 되었는지에 대한 인생 스토리 입니다.



독일에 친근감이 있는 저로써도 독일인 하면 딱딱함이라는 선입견이 있는데요. 하지만 저보고 글로써 인류애가 물씬 느껴지는 따듯한 인간을 떠올리라 한다면 독일어권 문학가인 릴케를 떠올리게 되은것 처럼, 과학의 길을 걷는 분이라면 하이젠베르크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마음이 뜨뜻해지는 독서 경험이 되지 않을까합니다. 초반에 나오는 저자의 친구 로베르트에 대해 이런 평가를 합니다: “로베르트가 차분하게 말을 시작하면 귀 기울여 들을 수밖에 없는 어떤 힘이 느껴졌고, 그의 말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보다 더 무게가 나가는 것 같았다.” 저자 본인의 인품도 대단하게 느껴지지만 주변에 좋은 사람들로 가득한것 같아 너무 부럽고 간접적으로 포근함을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로베르트는 직접 만나보고 싶네요.

이제 조금 책에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면, 제목을 다시 설명하는게 좋겠습니다. ‘부분’은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일부분 혹은 과학적 지식을 뜻하구요. ‘전체’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뛰어 넘는 세계/우주/본질을 말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해석이며, 다른 해석으로 ‘전체’는 도덕, 철학, 인문학 등 을 포함한 큰세상을 뜻하고, ‘부분’은 세상의 일부인 물리학을 지칭한다 가 있습니다. ) 우리는 자연과학적 진실을 경험으로 부터 도출합니다. (철학에선 환원주의reductionism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경험은 생각으로 부터 나오고, 생각은 물질에 있는게 아니라 지각 대상을 우선 표상으로 변화시키고, 그로부터 개념들을 만들어 낸다 라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다시말해 물리학자인 저자는 물리학은 물질을 이해/지각 하는 학문이 아니라 상대적인/감각적인 경험을 통한 표상으로써 의미를 부여 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물리학에서 물리를 지워버리는 핵심을 제공하는 듯 합니다.

저자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이러한 주제의 씨앗을 같게 되었던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가 더 친숙 하여 플라톤의 동굴에 대해 감상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플라톤은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사실 그림자의 형체로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동굴 깊숙한곳에 벽면을 바라보도록 묶여 있으며, 우리 등 뒤로 누군가가 빛과 모형들을 사용해 그림자를 벽면에 영사해주면,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고 세계를 이해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많은 과학자가 지구는 평면이다 라고 주장했던 과거에 우리가 그것을 과학적 진리도 받아 들였던 것 처럼, 그 후 많은 과학자가 지구는 둥글다라고 주장하면 다시 또 그것을 과학적 진리로 이해하는 것 처럼요. 하지만 플라톤은 우리도 그렇고 과학자도 그렇고 사실 아무도 지구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했던 사람들 없다는 것 입니다. 한 평생을 바쳐 과학에 몰두한 사람이라면 더욱 받아드리기 힘든 주장일것 같습니다. 저자는 플라톤에 반론하기 위해, 세계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원자 단위로 다가가게 되었고, 양자론과 불확정성을 맞이하기 되었던 것 같습니다.

플라톤 공부할때 기억나는 하나의 기하학 예가 생각 납니다. 삼각형 내각의 총합은 180도 라는 수학적/과학적 진실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냐는 질문 입니다. 전통적인 과학의 입장이라면, 인간이 세계에서 여러 삼각형체를 경험하게 되고, 데이타 수집과 연구로 180도 내각의 공식을 수립하게 되었다고 설명 할텐데요. 플라톤은 “삼각형” 이라는 이데아나 180도 내각의 진리는 우주에 먼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후 인간이 인식하게 된것 뿐이라고 합니다. 과학이 정확하다면 이건 단순히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라는 논리 일 수도 있지만. 과학은 제한적이고 진리는 완벽하다는 전제라면 조금 더 의미있는 의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의문에 대해 언어학자 촘스키는 언어구조란 경험적으로 생성된것이 아니라 선존재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 문명의 언어구조를 보았을 때 head-to-toe 혹은 toe-to-head식의 다양성은 있지만, 만약 언어구조가 인간에 의해 개발된 지식이라면 body-head-toe, head-toe-body등 더욱 다양한 구조가 발생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지적입니다. (물론 고대 문명간의 교류가 없다는 전제 하에 개별적인 언어발달을 가정한 가설이겠죠.)

저는 과학도가 아니지만 참 모범적인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과학은 세상의 확실한 부분으로 세계를 정의 하지만, 진리에 한발자국 더 가깝게 가려면, 자신이 모른다는것도 인정해야 한다고 조언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외 저자는 과학자의 책임 혹은 도덕철학적 고민들도 제시해 주시는데요. 저자는 참된 스승, 혹은 올바른 선배의 모습으로 보여져 마음이 든든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유행따라 혹은 서툴게 양자역학을 입에 올리는 것보다, 철학적인 사고, 모범적인 토론과 연구, 도덕 철학 등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습니다. 저도 언젠가 플라톤의 가르침으로 하여금 철학의 각도에서 세계의 대한 저자와 비슷한 질문을 품고 있었는데, 저자와 같이 끈질기게 파고 들지 못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겠다는 변명으로 질문하기를 보류한것이 아닌가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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