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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MS

2022년 독서모임을 하면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독서모임을 통해 여러 책들을 접하고 읽고 생각이 깊은 사람들과 토론할 수 있었던 경험이 너무도 귀합니다. 지난 해동안 읽었던 책들의 북리뷰를 공유합니다.


먼저 팩트풀니스, 이 책은 저의 무지를 일깨워주었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치우칠 수 있는지에 대해 경계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맨 앞의 문제에서 4문제 맞아 충격 받으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간극본능 부분에서 p. 60의 “간극 본능은 분할을 연상케 하지만 알고 보면 완만한 다양성에 불과하고, 차이를 연상케 하지만 사실은 수렴하는 차이며, 갈등을 연상케 하지만 사실은 합의에 이르는 갈등이다”라는 부분이 와닿았습니다. 이분법적 사고가 얼마나 단순하고 미성숙한 생각인지를 새삼 느끼며 다양성에 대한 인식과 존중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부정본능 부분에서는 p. 100의 “그러나 이미 이룩한 발전을 외면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는 스트레스다. 사람들은 내가 그들이 몰랐던 거대한 발전을 보여준다는 이유로 나를 종종 낙천주의자라고 말한다......아주 진지한 ”가능성 옹호론자“다.....낙천주의가 아니라 상황을 명확하고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세계를 건설적이고 유용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제 자신이 항상 낙천적이라고 생각했던 점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낙천주의가 현실을 외면하고 대책없이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발전 가능성, 건설적 방향에 대해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면서 동시에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균형 있고 명확하게 이해하는 시각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전에 중국에서 전해져내려오던 이야기인데 자신을 둘러싼 현상의 표면적 모습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이 현상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라는 시각으로 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사람이 말을 키우고 있었는데 그 말이 집을 나가 이웃 나라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이를 어째 자네 참 안 되었네 했다고 해요. 그러나 이 사람이 글쎄요,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구요라고 했다네요. 그런데 며칠 뒤 이웃 나라로 갔던 말이 3~4마리의 다른 말들을 이끌고 다시 돌아왔다고 해요. 그래서 이 사람은 갑자기 말을 4~5마리 갖게 된 거지요. 동네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잘 되었다 너무 좋겠다 했는데, 그 때도 이 사람은 글쎄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구요라고 했대요. 그런데 이 사람의 아들이 이 말들을 타고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다리가 부러졌다고 해요.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안 되었다고 했는데 이 사람은 역시 글쎄요, 좋을 수도 나쁠 수도요 했고, 이웃 나라에선 자기 말을 훔쳐갔다고 전쟁이 났는데 마을 모든 청년들이 전쟁에 끌려갔지만 이 사람의 아들은 다리가 다쳐 전쟁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고 해요. 동네 사람들이 잘 되었다 운 좋다 했고 그 때도 이 사람은 글쎄요, 좋은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구요. 이 이야기는 실화인지는 모르나 오래 전부터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항상 어떠한 일이나 현상의 다양한 측면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간극본능과 부정본능을 읽으며 좀 더 다각적인 측면에서의 사고와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가 쉽게 오류에 빠질 수 있는 통계적 도표로부터 사실의 왜곡에 대해 인지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p.224) 누군가가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는 그가 특정 집단에 속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때 주의해야 한다. 이 경우는 같은 집단에서 다른 행동을 보여주는 사례일까, 아니면 다른 집단에서 같은 행동을 보여주는 사례일까?


p.231) 우리는 비교 불가능한 여러 집단을 일반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며, 우리 논리에 숨은 광범위한 일반화를 찾아내려고 또 노력해야 한다.....하지만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언제든지 예전의 단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재평가해 우리가 틀렸다는 사실을 기꺼이 시인해야 한다.


일반화 본능을 읽으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학창시절 내내 단체생활을 중시하는 문화에서 살았던 때가 기억났다. 개인보다는 내가 속한 집단의 규율에 따라야 하는 것이 당시 우리나라 사회의 통상적인 가치였고 개인은 단체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거나 개인적 행동은 금지되는 상황도 많이 맞닺뜨려야 했다는 생각이 당연시 되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할 때쯤 되었을 때 다원주의, 탈구조주의 등을 알게 되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관점에 대해서도 존중해야 함을 배우게 되었다. 이후 미국에서 연구방법론 수업을 들으면서 교수님께서 주관성과 객관성에 대해 2~3주간을 할애하며 정말 많은 토론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제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변모하고 있고 간극 본능이나 일반화 본능이 점차 많이 극복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p.262) 가치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려면 조부모의 가치를 생각해보고, 그것이 내 가치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라.


흥미로운 전략이라는 생각이 든다. 운명본능에서 사회와 문화는 움직이지 않는 바위가 아니라 계속 변한다는 이야기에 동의한다. 언젠가 약 5~6년 전으로 기억되는데, “우리나라의 세계적 도약은 마치 달리기를 하다가 뒤로 돌아 뛰어라고 하여 달리게 된 것 같은 상황”이라고 들었다. 우리나라가 달리기의 뒷부분이었는데(초등학교 때 기억나요. 친구가 일본 다녀왔다면서 일제 물건 사오면 부러워했던 시절이었죠.) 어느 순간 현대차, 삼성전자, 당시 대우전자 지금의 LG 등이 수출시장을 석권하면서 우리나라가 선두로 우뚝 솟았던 때 이런 얘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될 수도 있고 어제 꼴등이 오늘의 일등이 될 수 있다는 말에 (이분법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그것은 단지 설명하기 위해 두 극단을 쓴 것 뿐입니다^^) 동의하고,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p.272) 이 사이트에서는 전 세계 모든 멸종위기종의 상태를 볼 수 있다. 이곳에 자료를 꾸준히 업데이트 하는 사람은 전 세계의 수준 높은 연구원인데, 이들은 서로 다른 동물의 야생 개체 수를 축적하고, 그 추세를 관찰하는 공동연구를 진행한다.....지금 적색목록(Red List)이나 세계야생생물기금(World Wildlife Fund) 사이트에 들어가보면 일부 지역의 개체 수와 일부 아종(subspecies)은 줄었지만 호랑이, 대왕판다, 검은 코뿔소의 전체 야생 개체 수는 지난 몇 년간 모두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단일 관점에서 벗어났다면, 다시 말해 그때까지 이룬 진전을 좀 더 이해하고, 그런 활동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동안의 진전을 좀 더 적극적으로 알렸더라면 더 큰 성과를 얻었을지 모른다. 문제점만 끊임없이 듣기보다 진전의 증거를 듣는다면 더 의욕이 생기지 않을까.


제가 교육분야에서 일하는데 학교 교사들도 아직까지 멸종위기의 동물에 대해 학생들에게 수업을 하지만 이런 업데이트 된 사실은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강의할 때마다 이 점을 강조해서 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매일매일 업데이트가 필요한 정말 스피디하게 발전하고 변모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대전환의 시대인데도 아직 우리의 여러 생각의 패턴이나 생활의 습관은 예전 단계에 머물러 있었구나 반성하게 됩니다.


p.277) 산부인과 의사가 절대 지적하지 않는 분야


우리가 전공 분야나 영역에 갇혀서 터부시하는 주제가 있는데 이것이 도리어 우리의 전공 분야를 깊이 있게 만들어 줄 수는 있으나 좁은 생각에 주변의 넓은 곳을 볼 수 없게 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점에 크게 동의합니다. 선을 긋는 위험성에 대해 항상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알고리즘: 인생을 계산하다라는 제 분야가 아닌 책이어서 혼자서는 절대 읽지 않았을 책을 독서모임을 통해 접하게 된 귀한 책이었습니다. 또한 실리콘밸리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마무리 모임을 하면서 책 내용 중 어려웠던 부분들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현명한 생각들을 공부하고 그 과정을 똑같이 밟아보고 그것을 이해하고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정신의 미식가적 활동이다....책을 읽는 것은 남의 뇌로 생각하는 것이다.(: 전문가의 내적 두뇌) 하지만 읽는 것을 소화하는 과정은 우리 자신과의 지속적인 대화다.


전문가(expert)들이 어떠한 전문적 영역에서의 업무를 처리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그 전문가의 두뇌 속에서 보이지 않게 이루어지는 과정을 거쳐 결과를 도출합니다. 따라서 실제 도제제도처럼 이러한 전문가의 노하우를 가까이에서 배우고 싶을지라도 이는 그 전문가의 두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시화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교육적 활용에 대한 장점을 이야기 할 때 이 비유를 종종 사용합니다. 유아들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전문가의 두뇌 속 사고의 과정을 가시화 하고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테크놀로지의 도움일 수 있는 것이라구요. 예를 들어 소리는 공기의 진동입니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공기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인간은 큰 북 위에 수많은 콩을 올려놓고 이를 치면 공기가 떨리면서 소리가 되는 원리를 조금이나마 가시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소리가 날 때, 또는 음악이 연주될 때 그 파장을 윈도우 화면에서 보여줍니다. 좀 얘기가 많이 빗나간 듯 보이지만 독서는 남의 뇌로 생각하는 것이라는 글을 읽으면서 전문가들의 보이지 않는 두뇌 안에서의 사고 과정을 조금이나마 간접 경험할 수 있는 독서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철학은 항상 어렵다고 생각하여 좀처럼 철학 관련 책은 손에 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손에 들지 않았다기 보다 엄두가 안 나 못 했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독서모임을 통해 철학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거기다 철학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한 책들도 수두룩하고, 그 중에는 각자의 방식으로 저술한 훌륭한 저서도 많다. 물론 이 모든 저술은 아무리 시대를 뛰어넘는 척해도 항상 자신의 시대적 관점에서 철학사를 관찰할 수밖에 없다. 가령 19세기 초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철학을 자신의 저서와 함께 그 절정에 이른 상승선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그의 젊은 경쟁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만 해도 벌서 그처럼 자기 위주로 철저히 해석한 철학사를 격하게 반대했다.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평가한 책을 읽는 것은 마치 [자기가 먹은 음식을 남들에게 씹게 하려는 것]과 비숫하다는 것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철학이나 인문학 저서는 관심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독서에 편식을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왠지 이 책은 고리타분한 철학적 입장이나 철학사가 아닐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열심히 일어보겠습니다.


“작가 로베르트 무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헤매면서 나아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리고 전공분야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햇수가 늘어갈수록 지식이나 알아야 할 것은 너무 방대하고 내 지식은 그 중 너무도 일부라는 생각이 더욱 들어갑니다. 오히려 학사나 석사 졸업 때 오만한 지적 자만심이 있었던 듯하고 시간이 갈수록 모르는 게 많은데 아는 척 하고 있을 때가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처럼 “우리는 아는 게 없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저자나 “우리는 지금 헤매고 있다”고 신랄하게 말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아는 게 많은 상태라는 반증으로 보여져서 오히려 더 존경스럽습니다.


“이 새로운 그리스 문자에는 장점이 몇 가지 있었다. 먼저 페니키아 문자보다 배우기가 쉬웠다. 이집트의 상형문자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리스어의 음절과 낱말로는 추상적인 것도 비교적 잘 표현할 수 있었고, 형용사와 동사도 쉽게 명사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이런 문자적 특성이 그리스에서 철학과 학문이 탄생하기 좋은 전제 조건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의 유럽에도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고대 그리스어의 유구한 성공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일례로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 [누스페어(Noosphere)] 같은 디지털 세계의 개념들조차 그리스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대 그리스어의 특징과 대부분의 학문 분야에서 어원을 논할 때 그리스어의 단어를 이용하는 점이 바로 이러한 이유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일전에 아라비아 숫자의 형태가 초기에는 지금의 숫자와 조금 상이한데 그 이유는 각 숫자의 양을 각의 수와 맞춰서 그렸기 때문이라는 점이 신기했었습니다.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이 기호를 만나 나름의 논리를 갖추었던 시대를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인간은 우주의 음악을 듣지 못한다. 그 음악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울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귀에는 우주의 화음을 들을 수 있는 감관이 없다. 각종 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진 대도시에서는 밤중에 별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피타고라스학파는 음들 사이의 조화로운 간격이 수의 비율로 표현될 수 있음을 인식했다...이처럼 하늘의 수학은 우주 행성들의 음을 미리 규정해 놓았듯이 악기에도 똑같은 것을 정해 놓았다....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신들과 인간, 하늘과 땅이 보편적 질서, 즉 우주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보편적 우정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엔 모르는 철학자들 이름이 계속 나와서 성경의 레위기를 읽듯이 읽어나가기 힘들었는데 이제 좀 이해하기 쉽게 기술되어 있어서 훨씬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모든 학문은 분절된 교과로서가 아니라 결국 그 근원은 하나로 통한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라고 알려져 있는 직각삼각형 명제가 피타고라스가 발견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으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 현재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보편적 진리에 대한 의문 또한 듭니다. 작곡을 잘 하는 사람들이 수학을 잘 한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우주 안에서 서로 결합되는 보편적 우정이라는 표현이 우주 내의 다양한 원리를 하나로 통합하는 의미로 참 적절하게 쓰여진 문구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건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본래의 의미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최선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즉 힘없는 동맹국들을 인정사정없이 착취하고 도구화하는 전횡을 통해 자국의 경제적 자유를 확보한 것이다....그 대가로 동맹국들은 아테네에 분담금 형태의 세금을 바치고 아테네의 사법권을 인정하고 아테네 화폐를 받아들였다. 에게해의 섬들에는 아테네 감독관들이 파견되어 현지 정치를 감시했다. 심지어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의 냉전 상태가 끝난 뒤에도 아테네는 이 동맹과 자국의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려 했고 혹시 배신하는 나라가 있으면 즉시 공격해서 잔인하게 응징했다....민주주의는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만의 것이었다.....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해당하는 아테네의 랜드마크는....파르테논 신전이었다.....이 건물에 신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사뭇 당황스럽기까지 하다.....파르테논은 아테네의 국가 금고와 델로스 동맹의 전쟁 금고가 보관된 장소로 한마디로 재물과 폴리스 자체를 찬양하는 곳이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미국의 연방 준비은행이 입주한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그리스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시발점인 것처럼 배웠던 순진했던 무지함에 대해 다시금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부모를 매우 동경하고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경할만한 존재로 경외하게 된다. 그러나 아이의 머리가 커가면서 부모도 실수를 할 수 있는 한 나약한 인간임을 알게 되고 더 시간이 지나면 아이가 부모를 돌봐야 하는 반대의 상황이 생기는 것을 보면 인간의 성장이 성숙과 발전을 통해 이전에 막연하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던 것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버텨읽을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로타고라스의 말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존재해서 존재하는 것들과 존재하지 않아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척도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면 세상 모든 것은 그저 주관적이고 상대적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의견에 동의하면 그것은 진리로 퍼질 수 있다. 반면에 다수가 내 의견을 거부하면 그것은 의미를 잃는다. 달리 말하자면 오직 인간만이 만물의 척도라면 어떤 발언의 진리성을 결정하는 것은 그 말의 [질]이 아니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양] 즉 숫자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앎을 그저 단순히 [소유하고 있는 것]과 실제로 [갖고 있는 것]으로 구분한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내가 새장 속에 많은 비둘기를 소유하고 있다고 상상하자고 말한다.....즉 앎은 (어떤 식으로건) 단순히 소유하는 것을 넘어 ([장악한다]라는 의미에서)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런데 나는 잘못된 비둘기를 잡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까? 그것을 위해서는 내 앎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하고 높은 망루 같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그것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다른 새장에서 얻은 [메타 앎]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새장에서도 내가 올바른 비둘기를 잡았는지 판단할 수 있으려면 또다시 더 높은 앎, 즉 [메타-메타 앎]이 필요하다.”


교육학에서 인지와 메타인지의 중요성을 논하는데 이미 플라톤이 메타인지, 초메타인지에 대해 인식하고 논의했다는 점에 또 한 번 감탄을 하게 됩니다.


“이데아(idea)라는 말은 원래 [외관]이라는 뜻이다. 즉 내 눈에 [보이는] 사물의 외형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데아는 바로 직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나는 오직 원들만 볼 뿐 그 모든 원들의 뒤에 공통으로 숨어 있는 이데아는 보지 못한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감각이 아닌 오직 내면의 눈, 정신의 눈으로만 보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즉 이데아는 모든 감각적 현상 뒤에 숨겨진 진짜 현실이다. 이 숨겨진 현실은 보편적이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고 이상적이다. 또한 완벽하고 그로써 더할 수 없이 선하다.”


“삶의 지혜, 즉 [프로네시스 Phronesis]는 모든 미덕 가운데 가장 중요한 미덕이다. 마지막에 어떤 미덕을 언제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는 것이 바로 이 미덕이기 때문이다.....이처럼 당당한 방식으로 자기 확신을 가진 것은 칭찬받을 만한 품성으로 여겨졌다.....인간의 프로네시스를 본능이 아니라 경험과 인식을 통해 성숙한 오성적 미덕, 또는 내가 살아가면서 삶에 대해 취하는 [태도 habitus]로 간주한다. 프로네시스가 있는 사람은 자기 삶을 조망하고, 스스로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자신의 판단을 반성하고, 그런 다음 개별 상황마다 최대한 선한 삶을 고려해서 총체적으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삶의 지혜에는 두 가지 도전 과제가 있다. 우선 나는 타인들과의 교류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나는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이것은 개인의 삶에서 행복을 좌우하는 하나의 측면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나는 그 과정에서 나 자신과 행복할까? 사회적으로는 명성이 높고 인기가 많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과는 불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라도 일괄적인 충고와 영리한 규칙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전에 [아비투스(Habitus)]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인성의 그릇이라고 해야 할까요? 삼성의 이부진 같은 사람과 조선시대 돈으로 사서 부자 신분이 된 사람의 성품의 크기나 깊이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었는데, 지구상의 수많은 인간들마다 참 다양한 개체가 살아가고 있는데 어떤 이는 이렇고 어떤 이는 저렇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문구 중 이런 말이 있습니다.


Weak people take revenge,

Strong people forgive,

Intelligent people ignore


약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무시당하지 않고 싶어서 억지로 겉으론 강한 척 복수를 하려고 분노를 참아내지 못하는 냄비같은 성품을 쉽게 드러냅니다. 강한 사람은 싸운다면 당연히 이기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용서할 수 있는 도량이 있고, 지적인 사람은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EO로는 모른 척, 못 본 척, 눈을 감아줄 수 있는 이러한 사람들의 다양한 아비투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교육이 어떤 유전적 영향이 사람마다 다양한 아비투스를 갖도록 할까에 대한 해답을 교육적으로 찾아보고자 노력하고는 있지만요. 본 책에서 프로네시스의 두 가지 도전과제 중 두 번째 과제가 인상 깊습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나 자신과 행복할까?” 이 생각은 첫 번째 과제보다 덜 생각해왔다는 반성이 되면서 앞으론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물어보고 생각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피쿠로스와 함께 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역사에 진입했다. 철학을 [실천적 삶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본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철학자들을 [구루]로 보았고, 헤라클레이토스는 [고독한 현자]로 보았다. 이후 소크라테스의 등장과 함께 철학자는 [묻는 자와 찾는 자]가 되었다. 또한 플라톤은 철학자를 [세계를 개선하는 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의 전문가]로 간택했다.”


본 저서는 철학사는 아니지만 저자가 말하는 각 철학자들의 철학 특성을 중심으로 흐름을 정리해볼 수 있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천상에서의 이전 삶을 기억함으로써 특정한 추상적 것들을 배운다고 한다. 플로티노스는 이 이론을 무의식의 복잡한 학설로 발전시켰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무의식은 한편으론 반사와 자연스러운 본능으로 이루어져 있고, 다른 한편으론 천상의 것이나 다른 전생에 대한 우리 영혼의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간이 죽음으로 점점 다가설수록 이전 삶에서 있었던 일들이 (영혼 속에서) 기억나면서 영혼은 현생의 이런저런 기억들을 무시하고 그냥 흘려보낸다. 왜냐하면 영혼은 육체적인 것으로부터 벌써 어느 정도 정화되었을 뿐 아니라 현세에서는 (머릿속에) 없던 것들도 다시 기억에서 불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고대의 모든 선험적 관념들 중에서 가장 지적인 관념은 아마 플로티노스의 일자 철학일 것이다....플러티노스는 원래 철학을 해나간 것이 아니라 지성인들에게 영원한 매력을 풍기는 섬세한 대체 종교를 발전시켰다.”


기독교의 유일신과 플러티노스가 말하는 일자가 어떻게 다른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대신 유일신에 대한 절대적 순종과 맹신이 아닌 좀더 지식인들이 원하는 방식의 구속 없는 종교로서의 성격이 보여집니다. 과연 전생이라는 것이 있을지 아직 답을 모르겠으나 우리가 가끔 꿈에서 언젠가 본 듯한 익숙한 장면이 보일 때라든지, 현생에서도 이런 분위기 언젠가 경험했던 적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긴 합니다. 그것이 전생인지는 모르겠으나. 얼마전 넷플릭스 드라마 중 [내일]에서 전생이나 천국과 지옥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인연이라는 것이 전생에서 다음 생으로 여러 차례 이어지면서 계속 역할만 바뀔 뿐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람이 자살을 한 경우에는 인연의 실타래(손목에 묶여 있는)가 끊어져서 더 이상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다음 생에서 다른 인연으로 만날 수 없게 된다는 스토리가 흥미로웠습니다. 만약 당시 지배적이었던 종교가 기독교가 아니었다면, 지금 남아 있을 고서의 종류도 많이 달라졌을 테고 종교의 모습, 사람들의 생각의 방향도 달라졌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우리가 현재 남은 유물들(고서, 사상서 등 포함)을 통해 현재의 지식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지만 얼마나 많은 다른 측면의 사상서들이 불타 없어졌을까, 당시 지배층의 지향하는 생각의 틀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기준으로 현재 우리가 접했어야 할 지식과 사고가 차단되고 걸러졌을지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시간은 누군가 [시간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어야만 실제로 존재한다. 게다가 이러한 주관적 시간 감각은 언제나 하나의 시간, 즉 현재일 뿐이다.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는 경우에도 나는 [현재에서] 과거나 미래를 생각한다. 시간은 늘 [지금과 여기]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지나간 것의 현재, 현존하는 것의 현재, 앞으로 다가올 것의 현재가 있다. 왜냐하면 이 셋은 영혼 속에 있고,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간 것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존하는 것의 현재는 인상이고, 앞으로 다가올 것의 현재는 기대이다.]”


시간은 흐름 속에 지금도 계속 아날로그적으로 있는데 그 안에서 인간이 감각하는 시간의 속성은 오직 현재로서 존재한다는 점에 공감이 됩니다. 따라서 지나간 현재들이 모여 과거릴 이루고 이는 기억으로 남으며,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들이 계속 흐르고 있고, 그 현재들이 인간에게 많은 경험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이는 또 인간의 생명이 지속되는 한 있을,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현재들이 미래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펼쳐지려고 기다리고 있을텐데 그것은 두려움이나 불예측성이라기 보다는 [기대]라고 표현되어 있네요.


“실재(reality)란 실제 [사물들]이 존재하는 모습이 아니다. 실재란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이고,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은 오직 우리의 지성으로만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 수업을 듣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런 사고가 생경할 것이다. 어쨌건, 달에 있는 돌들은 인간이 그걸 보고 돌로 인식하고, 달 표면의 암석으로 정의 내리지 않았다고 해서 달에 있는 돌이 아닐까? 디트리히도 그렇다고는 말 못할 것이다. 다만 그 돌은 인간 정신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인식의 대상이 되었다고 나름 타당하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적인 의미에서 돌들은 인간 정신과의 관계를 통해서야 이지적 세계의 일부가 된다. 이런 시각과 함께 디트리히는 철학의 새로운 주관적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대담하게 열어젖혔다.”


실재란 (실제 하는) 사물들이 존재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즉 사물들이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실재가 아니라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이를 인식하는 인간과의 정신적 관계 맺음을 통해 비로소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의미를 가진다는 뜻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좀 이해하기 어려운 문구이긴 합니다. 다만 달 표면의 암석도 인간이 정의 내리든 정의 내리지 않든 상관없이 암석으로서 실재하는 것인데, 다만 달 표면의 암석 자체로서 의미 없이 존재할 수 있는데 이것을 인간이 돌, 암석이라고 규정하고 인간 내면의 정신적인 인식과 사고 속에서 암석으로 관계 맺게 됨으로써 비로소 암석으로서의 진정한 실재의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이해하셨는지 마지막 토론 때 의견 들어보고 싶습니다.


한 해의 리뷰글들을 묶어 다시 읽어보면서 제가 이런 고차원적인 생각도 했었다니 놀랍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이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그 작가들이 저의 잠자고 있던 특정 사고의 부분을 각기 터치하여 이러한 생각들이 떠오르게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년에도 우리 독서모임의 구성원들과 함께 읽게 될 다양한 주제의 책들과 마무리 모임의 소감 및 토론에 큰 기대를 걸며 그 한 구성원이 된 2022년은 앞으로 제 커리어와 인생 전체에도 의미 있는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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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바람님과 STEVY님, 두 분이나 저에게 한번 "불편한 편의점 2탄"을 적어봐라고 건의해 주셔서 이렇게 한번 적어봅니다. 인물 특징과 인물 연결에 대한 "축"만 잡아 봤습니다. 작은 사건들이나 시간의 구체적인 흐름은 아직입니다..ㅎㅎ 그냥 재미로 봐 주세요.. 추신; 그런데 여기에 적어도 되나요? 안 돼면 알려주세요...^^ 불편한 편의점 2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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