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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함을 위한 일원론의 재고찰


이 책의 시작은 매우 인상적이다. 프롤로그에 나오는 코끼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파잔 의식. 고도로 사회화된 현대 인류 사회에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영혼을 파괴시키고 있으며 동시에 파괴당하고 있다. 저자는 에필로그까지 관통하며 그 파잔을 그치는 방법으로 일원론의 필요성, 필연성, 당위성을 설파하고 있다. 저자의 문제 의식과 그 해결 방안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역사적인 사료들에 대한 해박함은 매우 훌륭하게 평가되어야 함이 합당하다.

이원론적 사고의 과학에 대한 도전

우주론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우리를 지배하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의 근원을 거대한 우주의 탄생과 그 발전을 지배하는 법칙으로부터 소외당한 우리들의 존재 의미로부터 기인한다고 생각해서였을지 모른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와 현대 물리학의 주류인 양자역학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이원론적 직관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다중 우주론과 평행 우주론의 기반인 관찰자의 역할에 대한 설명은 과학적인 지식이 없다면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다. 어쩌면 인류 철학사를 관통하는 일원론과 이원론에 대한 논쟁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식론의 한계에서 기반할지 모른다. 일원론은 그 비약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자신이 옹호하는 일원론의 합당성을 우주론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얼마 간의 비약이 필요했다는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인류와 문명에 대한 이야기는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으로 지식 전달 매개체로는 찬사를 아끼지 않을 수 없다. 인류 사회는 발전했을지 모르지만, 인류 개체의 고민은 변화하지 않았다. 길가메시의 고민들과 현대인의 고민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어느 정도 공감은 한다. 은하철도 999라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인간은 유한한 삶 때문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이 항상 유한하기 때문에 영생에 대한 마르지 않는 갈망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어쩌면 그 영생이 손에 잡힐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앞서, 철학적인 갈등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당신은 어떻게 영생하고 싶은가?

사상과 철학의 일원론적 환원

그리고는 세상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베다부터 시작해서, 도교, 불교, 서양 철학, 그리고 기독교까지. 저자는 모든 사상은 일원론으로 환원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칼 야스퍼스가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이야기 한 축의 시대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기원전 900년에서 200년까지 세상의 주요 종교과 철학이 이 시기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저자는 거기에 더 나아가, 이들 사상이 결국은 일원론으로 수렴된다고 이야기한다. 거기까지는 좋다. 축의 시대를 태동시켰던 시대 상황이 지금에도 적용이 될 수 있다고 백번 양보할 수 있다. 이원론으로 혼란했던 시기를 일원론으로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도 열어둘 수 있다. 일원론으로 이원론으로 인한 정체성 상실을 극복할 수 있을 수도 있다.

일원론은 정신 승리에 지나지 않을까?

그래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은 있다. 일원론이 우리에게 정신 승리는 가져다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을 바꿀 수는 있는가? 부처는 일원론 세계관을 기반으로 윤회라는 고통의 사슬을 끊고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이원론의 세계에서는 식중독으로 죽었다. 매트릭스라는 영화에서 열반의 경지에 이른 주인공 네오 역시, 현실 세계와 접속이 끊기면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어쩌면, 유발 하라리가 호모데우스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우리의 의식이 육신을 벗어나 독립적인 네트워크에 로딩이 된다면 일원론은 의미가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실과 분리되어 정신 승리 만이 존재할 수 있을테니…… 고도의 산업화와 자본주의화된 세상에서 인간 개체들의 소외는 심화되어가고 있다. 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개체의 발버둥은 다른 개체의 소외를 심화시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일원론은 그 모든 개체의 발버둥을 멈추게 하는 해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현실적으로 그럴 수 있을까? 그 발버둥을 멈출 이유를 자각하지 못하는 개체들의 수는 적지 않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축의 시대에 나타난 현자들의 일원론적 기반의 교훈들이 지금의 세상을 다르게 만들지 못한 이유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단지 식중독에도 사멸될 수 있는 고결한 정신승리일지 모른다.

자유함에 해결책은 현실세계에 있다

안타깝게도 이 책을 읽고도 나는 현실 세계를 바꾸어야한다는 이원론적인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물론, 저자가 이야기한 일원론적인 노력이 세상을 어느 정도는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실행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당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 여겨졌던 사회주의도 현실적인 문제로 자본주의의 반항에 좌초되었다. 이원론적인 세계관에서 진정 모든 개체에게 이상적인 사회를 수립했다고 한다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일원론적인 해결방안은 고민거리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이상적인 사회의 수립은 일원론의 이행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그와 다른 생각이 진리를 뒤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바꿀 수 있었다면 부처는 식중독을 극복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면 리차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 인간 개체는 진화와 자연 선택이라는 자연법칙에서 유전자의 횡포에 억압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 자연법칙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개체들의 행복이라는 공리는 일원론에 의해 극대화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법칙을 바른 방향으로 바꾸어낼 수 있다면, 공리의 극대화를 넘어 근원적인 해결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 대한 저자의 고민을 공감하면서도 저자와는 다른 해결 방안에 대해 고민해본다. 좀 더 현실에서 투철하게 싸워야 한다. 파잔의 의식이 휘몰아칠때, 두려움에 휩쓸려가지 말고, 그 현실을 직시하여 그 파잔의 의식의 흐름을 끊어낼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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