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서문 1973년
언덕길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아이들이 뛰어가고 시장바구니를 든 주부가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세상은, 모든 생명, 나뭇잎을 흔들어주는 바람까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들, 진실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고 그것들을 위해 좀 더 일을 했으면 싶었다. 고뇌스러운 희망이었다.
사람들은 수월하게 행과 불행을 얘기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불행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행복하다 한다. 전자의 경우는 여자의 운명을 두고 한 말이겠고 후자의 경우는 명리(名利)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나 싶다. 혹은 잡사(雜事)에서 손을 떼고 일에 전념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인지 모르겠다. 그들 각도에서 본 행, 불행에는 각기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론 노여움을, 때론 모멸감을 느끼며 그런 말을 듣곤 한다.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무궁무진한 인생의 심층을 상식으로 가려버리려는 짓이 비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류되는 불행, 그렇게 가치 지어지는 행복이라면 실상 그 어느 것과도 나와는 별 인연이 있을 성싶지 않다. 분명 환난을 겪는 욥에게는 행복의 비밀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권, 서문 1993년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바람에 드러눕는 풀잎이며 눈 실린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일사불란한 법칙 앞에서 나는 비로소 털고 일어섰다. 찰나 같은 내 시간의 소중함을 느꼈던 것이다.
1부 1권 1편 8장
“니는 내 목구멍에 걸린 까시다. 우찌 그리 못 살았노. 못 살고 와 돌아왔노.”
하다가 용이는 울었다. 월선이는 비실비실 도망치려 했다. 매를 치켜든 아버지 앞에서 달아나려는 계집아이처럼. 울음을 죽이려고 이를 악무는 용이 이빨 사이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그는 월선의 손목을 낚아챘다. 손목을 끌고 방으로 들어온 용이는 갓을 벗어던지고 등잔불을 불어 껐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여자의 나머지 한 손을 꼭 잡고 방바닥에 주질러 앉는다.
“어느 시 어느 때 니 생각 안 한 날이 없었다. 모두 다 내 죄다. 와 니는 원망이 없노!”
끌어안아 여자 얼굴에 얼굴을 비벼댄다. 남녀의 눈물이 한 줄기가 되어 흘러내리고, 또한 그들의 몸도 하나가 되어 높이 높이 떠올라가서 영원히 풀어헤칠 수 없는 처절한 사랑의 의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1부 1권 1편 10장
“기즉부(饑則附) 하며, 포즉양(飽則颺) 하며, 욱즉추(燠則趨) 하며, 한즉기(寒則棄)는 인정통환야(人情通患也)라*하나 땅이야 어디 그런가? 사시장철 변함없이 하늘의 뜻과 사람의 심덕을 기다리고 있네.”
“그기이 무신 말씸입니까?”
“배가 고프면 먹여주는 자에게 빌붙고 배가 부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떠나가고 따뜻한 곳에는 모여들고 추운 곳은 버리는 게 세상의 인심이라 그 말일세.”
1부 1권 1편 11장
“알맹이를 모르고서 겉치레만 따른다고 문명인이 된다 할 수는 없을 것 같소이다.
1부 2권 3편 1장
“첫째, 사램이 살아야제요.강산이 내 거라도 내 눈 하나 없이믄 고만인데 피를 쏟아감서 베만 짜믄 우짤 깁니까.”
1부 2권 3편 3장
숙명 같은 그의 생장과 부딪쳤던 환난이 어느덧 그에게 유랑하는 불행한 습성을 길러주기도 했으려니와 그의 핏속에는 이미 고독한, 어느 곳이든 정착할 수 없는 것이 있었던 성싶다. 질서가 있고 평온한 것 같은 마을은 본시부터 그의 발붙일 곳은 아니었던 것이다. 평지에 나간다면 뭍에 오른 고기같이 산에서 익은 발은 힘을 잃을 것이며 은신의 지혜는 쓸모없이 될 것이다. 그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면서도 산을 벗어날 용기가 없었다. 만일 혼잣몸이었던들 어느 개천가나 바위 틈새에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그는 우관선사를 찾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서움에 질린 별당아씨는 거의 발광상태에 있었다. 잠들지 않은 시각에도 헛소리를 지르며 헛것을 보며 낭떠러지로 달려가곤 했다. 환이도 역시 죽음으로써 얻어질 휴식을, 죽음에 이르는 황홀할 것 같은 종말을 눈앞에 보며 열망하며 어느덧 그 자신도 헛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1부 2권 3편 10장
비 갠 뒤의 햇빛은 유난히 맑다. 미나리밭이 눈에 띄게 푸르고 흐르는 도랑물을 햇빛이 희롱한다. 그 햇빛도 어느덧 꼬리를 감추었다. 바람이 거실거실 일기 시작했다.
1부 3권 3편 11장
“귀녀야.”
대답이 없다.
“나다. 강포수다.”
“흥, 또 왔구마. 어디서 뒤진 줄 알았더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포수는 안도의 숨을 내쉰다.
“여기 묵을 거 가지왔다. 받아라.”
몸을 질질 끌며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창살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딜이보낼게. 손은 넣어라.”
강포수는 꾸러미를 모로 세워 창살 사이로 넣으려 했다.
“강포수, 손.”
“머라꼬.”
강포수는 흠씬 놀라며 물러섰다.
“손.”
귀녀는 여전히 창살 밖으로 손을 내밀어 놓고 있었다. 강포수는 겁을 내어 떨면서 조그마한 귀녀의 손을 잡아본다. 조그마한 손, 손아귀 속에서 바스러질 것 같은 손이다.
“마, 마, 많이 여빘고나.”
“강포수의 손은 쇠가죽 겉소.”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였다.
“이, 이거 배고플 긴데.”
다시 꾸러미를 디밀려 하는데 이번에는 귀녀 쪽에서 강포수의 손을 거머잡았다.
“강포수, 내 잘못했소.”
“알았이믄 됐다.”
“내 그간 행패를 부리고 한 거는 후회스럽아서 그, 그랬소. 포전 쪼고 당신하고 살 것을, 강포수 아, 아낙이 되어 자식 낳고 살 것을, 으으흐흐…….”
밖에 나온 강포수는 담벼락에 머리를 처박고 짐승같이 울었다. 하늘에는 별이 깜박이고 있었다. 북두칠성이 뚜렷하게 나타나서 깜박이고 있었다.
오월 중순이 지나서 귀녀는 옥 속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여자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었다.
강포수는 귀녀가 낳은 핏덩이를 안고 사라졌다.
그를 아는 사람 앞에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1부 4권 5편 6장
“우리 일어서야 하오. 나라 없는 백성이 어디 있으며 일찍이 왜란 호란을 겪었으되 우리 주권을 빼앗긴 일은 없었소. 이, 이런 일은 역사에 없었소. 싸움 한 번 없이 고스란히 이, 이럴 수는 없는 일이오. 이 판국에 농부들이 농사짓고 선비들은 글 읽고 해야겠소? 설령 쓸개 빠지고 썩어 문드러진 대신 놈들이 나라를 파는 데 도장을 찍었다손 치더라도 백성 모르게 한 짓은 합당하지 못할 뿐더러 무효란 말씀이오. 모두 나라 은덕 입고, 이 우리 강산은 내 피 내 살점 아닙니까. 헌데 어찌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이오. 안 그렇소, 조공? 양반은 두었다 무엇에다 쓰겠소. 우리가 앞장서면 마을 사람은 다 따를 것이오. 그뿐이겠소? 기왕에 항거해온 의병들이 있고 우리 마을에서 일어선다면 그것으로 해서 인근에서도 일어날 것이오. 방방곡곡 백성들이 모조리 연장 들고 나선다면 무슨 수로 그놈들이 대적할 것이오?”
1부 4권 5편 15장
나라 헹펜이 이러저러하다 해봐야, 그보다는 지금 살기가 어럽기 돼 있고 악에 치받힌께 그자를 치자 카믄 모도 일어서게 돼 있지요. 그러나 지금 양반 상민, 있는 놈 없는 놈, 백성하고 관가, 그런 쌈은 아닌 기라요. 다만 그자를 치자는 거는 딱 두 가지 까닭이 있일 뿐인데, 그 하나는 그자가 시적 왜나막신이라도 끌고 나올 만큼 왜놈들 편에 빌붙어서 자게 영화만 생각는 역적이니께 이 차에 목을 쳐서 뽄뵈기로 삼자는 거요, 다른 하나는 누구 재물이든 간에 고방에 썩고 있는 거를 우리 의병이 써야겄다 그겁니다. 쌈이란 크나 작으나 배고파도 못하고 빈주먹으로도 못하니께, 동네 사람 인심이 딱 일하기 좋게 돼 있고 그동안 일이 되거시리 다 꾸미놨이니께, 임실 순창에는 의병들이 모이 있고 우리가 가믄 합세하게 딱 그리 돼 있다 그 말씸이오. 머 이런 일을 경영한다고 해서 잃은 나라를 당장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겄고 왜군이 물러갈 기라는 생각도 없십니다만 부모가 돌아가시도 곡을 하는 법인데 나라가 죽은 거나 진배없으니, 자겔[自決]을 하는 것도 충절이겄지마는 죽기로 작정하고 싸우보는 기이 지금은 도리가 아니겄십니까. 이분에 우리 군사들도 이길 기다, 살아남을 기다 하는 생각으로 왜군하고 대적한 거는 아니니께요. ’
이제는 지나가는 횃불도 없다. 어둠이 있을 뿐이다. 김훈장은 돌부처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선택은 끝난 뒤다. 화적떼 같은 소행이라고 끝내 노여워하고 반대했던 일은 지금 저질러지고 있다. 그러나 김훈장은 그들과 함께 이곳을 떠날 것이다. 해 떨어지기 전에 신주와 손자를 안겨 아들 내외를 산청 사돈댁으로 떠나보냄으로써 김훈장은 배수의 진을 친 셈이다. 지난번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아들 내외에게 어떻게 하든 명 보전하여 절손의 불효를 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를 김훈장은 잊지 않았다.
2부 5권 1편 10장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나라를 송두리째, 백성들을 송두리째 일본에게 빼앗기고야 말았습니다. 그 옛날의 슬픈 고구려인들처럼 우리도 일본에게 동화되고 만다면 영원히 영원히 우리의 민족과 국가는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저 슬픈 고구려인들을 기억하십시오. 생각해보십시오! 국토와 주권을 빼앗은 왜인들은 다음 우리의 문화를 빼앗고 우리 민족의 얼을 뺏을 것입니다. 우리 조선사람이 왜인들 옷을 입고 왜나막신을 신고 왜말을 지껄이는 광경을 상상해보십시오. 지금은 친일파 놈들이 그런 꼴을 하고 거들먹거립니다만 후일 우리 모두가 그리 되는 날에는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편지를 쓰기 위해 글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셈을 하기 위해 글을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싸우기 위해 글을 배우는 것입니다. 알아야만 싸울 수 있습니다. 알아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2부 5권 1편 10장
"정호야, 천성이 악독하고 교활한 자에게는 지식도 그 악독과 교활에 쓰이는 법이다. 연장도 쓰기 나름이 아니겠느냐? 우리 어머님께서 음식 장만에 쓰시는 칼이 도둑놈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연장이 될 수도 있고, 지식도 그와 마찬가지로 쓰기 나름이다. ”
“선생님!”
“오냐. 말해보아. ”
“우리 집에 계시는 생원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학문은 칼이 아니라구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
“뭐?”
“학문은 도덕을 높이는 것으로 싸우는 데 쓰이는 게 아니라 하셨습니다. ”
“으음…… 어째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제가 생원님께 여쭈어봤습니다. 어째서 우리는 왜적한테 나라를 빼앗겼느냐구요. 그랬더니 생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강도놈하고 선비하고 함께 길을 가는데 강도가 칼을 빼들면 짐을 뺏길 수밖에 없고 목숨도 뺏길 수밖에 없는 일 아니겠느냐고. ”
“또 생원님께서는 말씀하시었습니다. 천지만물의 이치가 힘이나 육신만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덕이 없는 도적이 번성할 수 없고 따라서 일본도 불원간에 망할 거라 하셨습니다. ”
“음, 옳은 말씀이시다. 그래서 정호가 내 한 말에 의심을 품었군. ”
“예. 선생님께서는 싸우기 위해 글을 배운다고 하셨습니다. ”
“음, 그랬었지. 그러나 도적과 함께 간 선비가 지혜로웠으면 도적에게 물건을 뺏기고 목숨까지 잃었겠느냐? 도적과 함께 가지 않는 방편도 있었을 게고 보신을 위한 방편도 있었을 텐데?”
“……. ”
“자고로 천하는 도적이 다스리는 게 아니고 성현이 다스리는 게야. 성현은 도덕이 높으시고 지혜로워서 도적의 침범을 용서치 않지. 그러나 도덕이 땅에 떨어지면 지혜로움도 땅에 떨어지고 그리하여 나라가 망하는 법이야. 홍수를 막기 위해서는 산에 나무를 심듯이 흑심 품은 이웃이 있으면 양병(養兵)을 하여 대비를 하고 이웃이 옳지 못할 때는 한발 더 나아가서 칼을 뽑아 칠 수도 있는데 학문이란 원래 사람으로서 옳게 가는 길잡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도적의 방편도 될 수 있고, 칼도 마찬가지, 우리가 뽑는 칼은 내 나라를 찾기 위한 충성과 희생이지만 왜놈의 칼은 탐욕과 죄악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둑의 무리 못지않게 경계를 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현의 길을 배웠으되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모르는 무리 말이다. 이들이 도둑과 합세하여 나라를 망해 먹은 셈이야. 첫째는 왕실, 왕실은 왕실의 안녕만을 위해 백성을 배반했다. 둘째는 고관대작, 일신의 영달과 일문의 무사태평을 위해 백성을 배반했다. 셋째는 선비들, 제 한 몸 닦기 위해 청탁(淸濁)만을 가려 백성들을 이끌지 못했으니 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배움에의 길은 내나라를 위한 것, 내 겨레를 위한 것, 총도 될 수 있고 칼도 될 수 있고 분필도 될 수 있고. ”
2부 5권 2편 7장
서희 앞에서 물러난 용이는 그 집 담장을 끼고 걸어간다. 새로 쌓은 담장에서는 아직 마르지 않은 횟가루 냄새가 풍겨왔다. 돌을 끼운 하얀 회벽의 담장과 맑아서 일렁이는 것 같은 푸른 하늘과 멀리 멀리서, 지평선 저쪽에서 비적단이 사진(砂塵)을 몰고 나타날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과― 용이는 문득 옛날 최참판댁 담장을 생각한다. 치수 도령에게 까닭 없이 매를 맞고 능소화(凌霄花)가 흐드러지게 핀 긴 담장 옆을 울면서 가던 어린 소년의 모습이. 능소화보다 짙은 놀이 하늘과 강물을 미친 듯이 불태우던, 마치 엊그제처럼 생생히 떠오른다.
2부 6권 2편 9장
“그라믄 우짜꼬? 나 정호하고 맹세를 했는데.”
홍이는 울상이 된다.
“무신 맹세를 혔는디?”
“후제, 크믄 말 타고 총 들고 독립운동하자고.”
“후제 일 아니란가?”
주갑은 껄껄 웃는다.
“하지마는 촌에 가서 공부도 안 하고 촌놈 되믄 말을 우찌 탈 기요? 총은 우찌 쏘고? 우리 선생님이 그러는데 배워야 나라를 찾는다고.”
“제에기럴! 아따야아 안 배워도 동학난리 때 이 주갑이 총 쏘았단께. 말이사 안 타보았지마는, 자고로 식자우환이란 말이 있덜 않더라고? 니 거 무른 대가리에 식자깨나 들었다고 벌써 우환인 기여. 하늘 보다 땅 보고 철기를 알면 세상 이치는 거기 다 있다 그 말인디, 에라 모르겄다.”
“그라믄 우짜꼬? 나 정호하고 맹세를 했는데.”
홍이는 울상이 된다.
“무신 맹세를 혔는디?”
“후제, 크믄 말 타고 총 들고 독립운동하자고.”
“후제 일 아니란가?”
주갑은 껄껄 웃는다.
“하지마는 촌에 가서 공부도 안 하고 촌놈 되믄 말을 우찌 탈 기요? 총은 우찌 쏘고? 우리 선생님이 그러는데 배워야 나라를 찾는다고.”
“제에기럴! 아따야아 안 배워도 동학난리 때 이 주갑이 총 쏘았단께. 말이사 안 타보았지마는, 자고로 식자우환이란 말이 있덜 않더라고? 니 거 무른 대가리에 식자깨나 들었다고 벌써 우환인 기여. 하늘 보다 땅 보고 철기를 알면 세상 이치는 거기 다 있다 그 말인디, 에라 모르겄다.”
2부 6권 2편 13장
최참판댁을 습격해 온 마을 사람들과 합류했을 때 일이다. 마을 사람들이 조준구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너는 서희를 위해 토지문서를 찾으려고 뛰어다녔다. 나라의 비운보다 서희 비운에 너는 더 많은 눈물을 쏟았다. 그때 넌 평사리 벽촌의 작은 개구리였어. 지금은 달라. 넓은 만주벌판에 서 있단 말이다. 잘난 사내들, 쓸개가 썩지 않은 사내들이 모여드는 곳이란 말이야. 삭풍 열사(熱砂) 속에 육신을 묻으려고. 한 달에도 몇 번씩 넘나드는 국경에서 너는 무엇을 보았나. 고향 잃은 가난한 내 겨레가 이불 짐에 솥단지 하나 얹고 두만강을 건너는 것을, 영팔이아재는 청인들 땅을 부치러 떠났고 용이아재는 벌목꾼이 되어 떠났고 이 사내는 마우재 고깃배를 타다 돌아왔다. 그렇지. 높은 곳에 좌정해 있었던 지난날의 이부사댁 나으리, 슬기로운 선비로 우러러보았던 이동진 씨. 그 사람조차 지금 내 눈에는 개새끼로 보인다. 그런데 너는 어떠냐? 너는! 한 계집아이를 잊지 못하고 꾀꼬리 새끼를 잊지 못하고 넌, 넌 더한 개새끼다! 한데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무엇을 타협하려 했나? 서희와 혼인할 생각을 했지? 당당하게 좋아하는 여자를 거머채는 게 뭐가 나쁘냐구? 아니, 아니다. 종신 종놈이 되어서라도 서희 곁에 있고 싶은 게 너 본심 아니었나? 안 그렇단 말이냐? 떠난다 떠난다 하면서 왜 못 떠나지? 그렇지. 높은 곳에 좌정해 있었던 지난날의 이부사댁 나으리, 슬기로운 선비로 우러러보았던 이동진 씨. 그 사람조차 지금 내 눈에는 개새끼로 보인다. 그런데 너는 어떠냐? 너는! 한 계집아이를 잊지 못하고 꾀꼬리 새끼를 잊지 못하고 넌, 넌 더한 개새끼다! 한데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무엇을 타협하려 했나? 서희와 혼인할 생각을 했지? 당당하게 좋아하는 여자를 거머채는 게 뭐가 나쁘냐구? 아니, 아니다. 종신 종놈이 되어서라도 서희 곁에 있고 싶은 게 너 본심 아니었나? 안 그렇단 말이냐? 떠난다 떠난다 하면서 왜 못 떠나지?
2부 7권 3편 10장
“잘 생각들 해보더라고. 주재소에 불지르고 왜순사 등에 칼 꽂는 것 그거만 능사 아니란께. 우리는 그냥 의병이 아녀. 의병이기보담 동학교도란 말시. 칼을 휘두르는 한펜 사람 맘에다 하눌님 뜻도 전하여야 한단께로. 그래야만 우리가 칼을 휘둘러 왜놈을 치는 명분도 서는 거 아니겄어?”
2부 7권 3편 12장
“예. 만주는 남의 땅이니까.”
“하지만 간도는 조선땅이오.”
“말로야 수천 번인들, 죽은 자식 뭐 만진다는 격 아니겠소?”
“허허허…… 그렇긴 하오만, 간도만 다녀오시겠소?”
“마음으로야 연해주, 그 밖의 우리 독립군이 있는 곳이라면 가보고 싶소이다.”
2부 7권 3편 13장
‘미친놈! 네가 정말 맞아 죽고 싶었던 겐가? 왜 무엇 땜에, 죄를 져서 그랬었나? 죄를 져서 말이야. 으흐흐흣! 아니야. 거기 가보고 싶었다. 거기 연못에 가보고 싶었다. 당신이 서 있을까 봐, 응 당신이 거기 연못가에 서 있을까 봐서. ’
환이 눈동자에 괴이한 열기가 떠오른다.
‘여보. 당신은 지금 어디 있소. 어디 있느냐구! 맞아서 속이 조금은 후련하우. 죄 땜에 아니오! 나는 살아서 이 끝없는, 이, 이건 끝이 없는 쳇바퀴요, 나는 한 마리의 개미 아니겠소? 아무것도 없는, 가도 가도 꼭 같은 길이오, 다만 길이 있을 뿐이오. 여보.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진달래 꽃잎 따서 화전 부쳐주겠다던. ’
환이는 흐느껴 운다. 꿈속에서처럼 흐느껴 운다.
2부 7권 4편 14장
“그럼 서방님 우리 만주로 갈까요?”
하는데 순간 길상이 기화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생생하다.
“만주?”
“예. 그것도 자신 없으시죠?”
“만주로 가면 어떡허나?”
“그곳에 가면은 지가 벌 수 있을 거예요. 서방님은 독립군이 되구요.”
“독립군…… 너는 기생질을 하겠지.”
“밥집을 하겠어요.”
“그거 진정이냐?”
“생각해본 거지요.”
“그래…… 그럴 거야. 생각을 해본다아.”
그러고는 말이 끊어졌다. 허망한 얘기였던 것이다. 그들은 다 같이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얘기했다. 화류계의 사랑은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소나기였다. 긴긴 여름 무더위 속에 내려지는 소나기.
2부 8권 4편 18장
살인귀건 흡혈귀건 아무래도 좋았다. 뭣이건 그는 핍박받아온 백성들 가슴에 등불로 살아 있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서울로 압송한 데 반하여 김개주는 위험인물이라 하여 체포 즉시 전주 감영에서 효수되었다. 위험시한 만큼 상민들 가슴에는 낙인처럼 뜨겁게 남아 있는 풍운아 김개주, 그 반역의 피를 지금 눈앞에 있는 아들에게서 본다. 반역의 피는 모든 상민들의 피다. 양반댁 유부녀를 데리고 달아난 것도 반역의 피 때문이다. 반역의 피는 억압된 상민들의 진실이요 소망이다. 수백 수천 년의 소망이다.
2부 8권 5편 8장
“홍아! 아버지 왔다!”
홍이 안방 문을 박차듯 뛰어나온다. 동시에 작은방의 문이 떠나갈 듯 열렸고 영팔이와 두매가 나왔다. 홍이의 얼굴은 홍당무였다. 영팔이 얼굴도 벌겠다. 두매 얼굴만이 푸르스름하다. 모두 벙어리가 되어버렸는지 마루에 걸터앉아 지카타비*를 벗고 있는 용이 뒷모습을 쳐다본다. 마루에 올라선 용이는 털모자를 벗어던졌다. 솜을 두어 누덕누덕 기운 반두루마기도 벗어던진다. 그러는 동안 말 한마디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 한 사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몸 전체에서 뿜어내는 준엄한 기운에 세 사람은 압도되어 선 자리에 굳어버린 채다. 방문은 열렸고 그리고 닫혀졌다. 방으로 들어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을 월선은 눈이 부신 듯 올려다본다.
“오실 줄 알았십니다.”
월선이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산판 일 끝내고 왔다.”
용이는 가만히 속삭이듯 말했다.
“야. 그럴 줄 알았십니다.”
“임자.”
얼굴 가까이 얼굴을 묻는다. 그러고 떤다. 머리칼에서부터 발끝까지 사시나무 떨듯 떨어댄다. 얼마 후 그 경련은 멎었다.
“임자.”
“야.”
“가만히.”
이불자락을 걷고 여자를 안아 무릎 위에 올린다. 쪽에서 가느다란 은비녀가 방바닥에 떨어진다.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 눈만 살아 있다. 월선의 사지는 마치 새털같이 가볍게, 용이의 옷깃조차 잡을 힘이 없다.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머리를 쓸어주고 주먹만큼 작아진 얼굴에서 턱을 쓸어주고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 눕힌다.
용이 돌아와서 이틀 밤을 지탱한 월선은 정월 초이튿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3부 9권 1편 1장
운명이라 해도 좋고 역사라 해도 좋고, 그 역사가 혹은 운명이 언제, 아니 가까운 시일 내에 광명을 안겨줄지 모른다는 희망, 하기야 자비롭고 정의를 구현하려는 이상, 그것이 속 다르고 겉 다르다 하더라도 하여간 세계대전의 전승국 지도자들이 헤프게 뿌려놓은 복음, 피압박민을 향한 민족자결이라는 황홀한 선언은 전폭적인 희망과 기대가 아니었던가. 지금 황홀한 무지개는 사라져가고 그들 각자의 이권이 냉혹한 모습으로 국제무대에 도사리고 있다손 치더라도 눈물 마른 자리에서 나약한 여자들이 한 가닥 희망마저 버린다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 아니겠는가. 아들 때문에 유식해진 어머니, 남편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된 아내, 세상 떠난 사람은 그렇다 치고, 명희가 듣고 오는 국외사정에 일희일비하고 어디 어느 곳의 무슨 선교사가 일본에 항의를 했다 하면은 당장 독립이 되어 아들이, 남편이 풀려나올 것처럼 기뻐하고.
3부 9권 1편 6장
흐느껴 운다. 병수는 어린것처럼 흐느껴 운다.
“무서워서 죽을 수 없었소. 백 번 천 번 죽으려 했었지만 그래도 죽어지질 않더군요.”
짝쇠가 강쇠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성님, 양반인가 배요. 무신 곡절이 단단히 있는갑소.”
여전히 강쇠는 침묵을 지킨다. 병수의 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눈동자는 엉뚱한 곳에 가 있었지만.
“그런 말씸일랑 안 하는 것이여. 못 다 살고 가면 차생에서 또 고생할 것인께로 살아보는 데꺼지 살아보고서.”
“주, 죽을 수가 없어서…… 여까지 왜 왔는지 모르겠어! 와서 생각하니…… 강물에 빠졌는데 이 못난 놈이 기어나오질 않았겠소? 으흐흣…….”
흐느껴 울더니 종내는 통곡이다. 여느 사람의 반밖에 안 되는 몸뚱이, 그나마 가죽과 뼈만 붙은 듯 여윈 몸뚱이는 멍들고 껍데기가 벗겨지고, 죽으려고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을까. 명이란 질기고도 긴 것.
3부 9권 1편 12장
며칠 전에 조준구와 마주 보고 앉았던 자리에 서희는 그림자같이 앉아 있다. 허울만 남았구나. 서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나비가 날아가버린 번데기, 나비가 날아가버린 빈 번데기, 긴 겨울을 견디었건만 승리의 찬란한 나비는 어디로 날아갔는가? 장엄하고 경이스러우며 피비린내가 풍기듯 격렬한 봄은 조수같이 사방에서 밀려오는데 서희는 자신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어느 곳에도 없었다. 서희는 죽음의 자리에서 지난 삶의 날을 생각하듯이, 사랑을 잃었을 때 사랑을 생각하듯이, 회진(灰塵)으로 화해버린 집터에서 아름답고 평화스러웠던 집을 생각하듯이, 어둠 속에서 광명을 생각하듯이, 그러나 서희에게는 생각할 뿐, 기구(祈求)가 없는 것이다. 생각은 흘러가고 돌아가고 골짜기에서 암벽을 돌아 마을 어귀의 도랑으로. 마음속에는 나비가 날아가고 비어버린 번데기가 가랑잎같이 흔들리고 있는데, 생각의 강물은 방향도 잡지 못한 채 생명의 허무, 사멸의 산기슭을 돌아간다. 어느 제왕이 영화를 한 떨기 들꽃만도 못하다고 하였다던가. 인간이 황금으로 성을 쌓아올린들 그것이 무엇이랴. 만년의 인간 역사가 무슨 뜻이 있으며 역발산 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영웅인들 한 목숨이 가고 오는데 터럭만큼의 힘인들 미칠쏜가. 억만 중생이 억겁의 세월을 밟으며 가고 또 오고, 저 떼지어 나는 철새의 무리와 다를 것이 무엇이며, 나은 것은 또 무엇이랴. 제 새끼를 빼앗기고 구곡간장이 녹아서 죽은 원숭이나 들불에 새끼와 함께 타 죽은 까투리, 나무는 기름진 토양을 향해 뿌리를 뻗는다 하고, 한 톨의 씨앗은 땅속에서 꺼풀을 찢고 생명을 받는데 인간이 금수보다 초목보다 무엇이 다르며 무엇이 낫다 할 것인가.
3부 9권 1편 18장
용이는 어둠을 쳐다보고 있었다. 검정 돔방치마를 입은 강청댁이 논둑길을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색 바랜 종이꽃과 칙칙한 빛깔의 화상(畵像)과 촛불에 흔들리는 머리 그림자, 밤새도록 월선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준 일이 생각난다. 우찌 저리 뻐꾸기가 울어쌓겄소, 목소리도 들려온다. 모깃불 옆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임이네 모습이 떠오른다. 용이는 돌아누우며 쓴웃음을 띤다. 어쩌면 자기 인생은 세 여자로 하여 결정되었고 끝나는 것 같아서다.
3부 9권 2편 1장
처음 용이는 무척 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천히 몸을 돌려가면서 종이와 연필을 찾았다.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꼭꼭 눌러서 글을 쓰는 옆모습에는 도적이건 대적이건 동기간인데 어쩌누, 찾아가는 것은 당연하지, 천륜을 끊을 수 없는 것이니께, 그런 독백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3부 9권 2편 4장
한복의 마음이 차츰 착잡해진다. 안정되었던 마음이 흔들린다. 마구 흔들린다. 심장이 방망이질하듯 뛴다. 피는 피를 부르게 마련이다. 그렇다. 대역죄인 살인자일지라도 피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운 것도 사랑 때문이며 원망도 사랑 때문이 아니겠는가. 한복은 자신에게 부과되었던 일에 대하여 배신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할 수 있다면 만나지 않고 떠나고 싶다 했던 형, 최서기를 통하여 형의 미쳐서 날뛰는 것 같은 모습을 한복은 상상할 수가 있었다. 옛날, 아득한 옛날 어머니를 매장하던 날, 음달진 곳, 솔방울과 자갈이 굴러 있던 곳, 소나무에 머리를 부딪고 피를 흘리며 울던 소년의 모습이 생생하게 한복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다.
'형!'
심장에서 피가 솟구쳐오르는 것만 같다. 입속에 고인 것을 뱉어내면 그것은 침이 아닐 것이며 새빨간 선혈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형!'
증오감은 그리움으로, 절실하고 강한 그리움으로, 한복은 달음박질치듯 걸음을 빨리한다.
3부 10권 2편 7장
화족(華族)의 자식이 아니면, 그 호사스런 양행을 성경 말씀을 빌리자면 바늘구멍에 낙타가 들어가기보다 어려운데 그 어려운 유학을 하고 돌아왔어도 일반 사람들은 전적인 존경을 왜 아니 보내는가, 오히려 무의식 속에 일말의 모멸감을 가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개화기에 있어서 필연성을 띤 것이기는 하지만 말을 하자면 일종의 기현상이기 때문이지요. 거창하게는 역사가 빚은 현상이라 할 수도 있겠고, 엄히 지켜져 내려온 내외법을 뚫는 거야 서민층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니까, 내외법이란 액면대로 말하면은 결국 예절 아니겠소? 예절이란 자고로 상층에 올라갈수록 형식에 굳고 아래에 내려올수록 엷어지는 만큼 엷은 곳이 뚫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그러나 서민층에서 의식적으로 뚫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거든. 밖에서 뚫었다, 강제가 먹혀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돈을 받기 위해 혹은 월급 많은 학교로 가자던 사회 풍경이 있었던 것을 우린 기억하지요. 그 진풍경을 생각해보면 알 만한 일 아닙니까. 그러니 새로운 교육을 받게 된 애초의 동기는 별로 향기롭지 못했다, 자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좋잖은 것만 들추어낸다면 끝이 없는 거예요. 도마 위에 올려놔 보세요. 난도질이야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3부 10권 2편 8장
그러나 소설을 쓴다는 것, 지금의 상현에게는 소설을 쓴다는 것, 쓰는 행위 이상의 절실한 무엇과의 대결상태, 문학은 하나의 방패였었는지 모른다. 싸움의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래도 좋은가, 이래도 좋은가, 수없이 자기 자신에게 의문을 던지면서 낫질도 도끼질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내부, 자신을 둘러싼 외부와의 대결은, 그러나 언제 끝날지, 과연 끝날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욕망과 갈등과 자포자기, 제약과 여건과 의무, 그 모든 것은 첩첩이 쌓인 가시덤불.
3부 10권 2편 9장
“선심 쓰는 놈들이야 으레껏 한 가지밖엔 모르는 법이야. 똑똑히 들어두어. 선심을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보다 고맙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 말이야. 재물로 사람을 엮어두는 관계처럼 허약한 건 없는 법이야. 또 선심 안 받아도 얼마든지 좋은 사람이 그놈의 선심 때문에 고맙다 고맙다 생각하게 하는 것도 좋잖은 일이야. 알겠나? 황태수! 사람이란 눈빛 하나, 찬밥 한 덩이 가지고도 평생의 우의를 맺을 수 있지만 황금을 쌓아도 친구가 못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는 걸 알란 말이야. 잘난 체하지만 가진 자만큼 고독한 인간도 없는 게야. 하느님께서 공평히 주신 거를 더 가졌다면 분명 빼앗긴 사람이 있을 터인즉 가난한 자는 슬프지만 탐욕에는 사랑이 없어.”
3부 10권 2편 16장
체면만 차리면서 굶어 죽을 순 없다는 생각들이었다. 한데도 신분문제에서만은 권위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서가 아닌 습관, 상것들을 하시하고 횡포하게 다루는 습관을 버리려 하지는 않는다. 지체가 없다면 재물이라도 있어야지 않겠는가 했던 김실댁의 말은 단적으로 그들의 생리를 요약한 것이다. 시외삼촌의 경우도 돈 많은 친구와 표면상으로는 동업이라지만 내막으론 수족 같은 존재로서 어장에 관여하고 또 윤선회사를 차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 만큼 재리(財理)에는 밝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족 같은 존재, 양반의 자존심은 버리면서 습관만은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점아기는 남편까지 그렇다는 생각은 아니한다. 오히려 재리에는 무능력한 사람이다. 돈을 길가 개똥 보듯 하지는 않았지만 선천이 무능력한 사람인 것이다.
3부 10권 3편 7장
“3호실 환자 말인데요, 어떻게 생각하면 좀 불쌍하기도 해요. 더러 문병 오는 사람이 있긴 있지만 한결같이 구경 온 사람 같지 뭐예요? 미치광이처럼 막 지껄여대는데 대꾸조차 하는 사람이 없어요. 어떤 할머니 한 사람만 불쌍하다 하며 울데요.”
“그것 다 인생을 잘못 살아서 그런 게야. 죽음을 맞이할 때야말로 어떤 형태로든 숨김없는 한 인간의 결산이 나온다고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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