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코로나를 핑계 삼아 3년만에 한국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가는 것이지만, 2주의 기간으로 길지 않게 잡았다.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각각 제주와 설악을 여행하고, 그동안 잊었던 한국의 추위에 의도치 않은 발동동 춤을 추더라도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러 빙판길을 헤메고 돌아다니겠다고 다짐을 하고 갔다.
인천공항. 호기 좋게 렌트한 최신 출고 차량은 운전 미숙의 길로 들어서게 했고, 예상보다 춥고 많은 눈으로 인해 적당히 가져간 점퍼는 소용이 없었다. 부모님 집 깊숙이 있던 10년도 넘은 낡은 핑크와 블루의 스키 점퍼는, 빙판길 부상이 무서워 주차장만 맴돌았다.
제주 동백 꽃은 겨울이라 빨갰고, 울산 바위는 하얗게 설악산에 박혀 있었다.
내일은 미국 생활을 위한 쇼핑을 하겠다며 밤 늦게까지 리스트를 만들며 뒹굴던 나는, 이튼날 아침 부고를 듣게 되었다. 혈액암으로 투병중이시던 당숙모. 아들과의 쇼핑중 당한 교통사고로 병원을 방문 했다가 병을 알게 되셨다는데, 투석을 통해 좋아지셨다 들었었다. 이틀만 미루었다가 찾아 뵈려 했었다.
눈은 그날 새벽부터 많이도 왔는데, 날이 춥지는 않았다.
촌수는 멀었으나 친정 엄마의 베프. 나는 병문안을 미뤘다.
명절이든 제사든 가족 행사 때면 매번 뵙고 반가워 했었다. 나는 병문안을 미뤘다.
당숙과의 연애시절, 빨간 프라이드를 타고 우리집 감나무를 구경 왔었다. 덜익은 홍시를 가지는째 꺽어주는 당숙을 놀렸었다. 나는 병문안을 미뤘다.
당숙모의 아이들은 유난히 낯을 가렸지만, 나를 잘 따랐다. 나는 병문안을 미뤘다.
적막하게 달려간 병원에서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하얀 천으로 쌓인 누에 같은 당숙모만 뵈었다. 사망진단서를 9장이나 들고 있던 당숙은 벗겨진 머리에 눈을 맞아가며 앰뷸런스에 올랐고, 낯을 가리던 동생들은 코로나 조심하라며 나를 배웅해 주었다.
마나님을 두분이나 두었던 증조 할아버지 덕에 많은 형제가 있던 할아버지. 한국 전쟁으로 남편 잃고 그 많은 식구들을 건사하신 할머니는 ‘너도 박씨’라며 손녀인 나도 지겹다 하셨었다. 그렇게 많던 식구들은 적은 자손들을 낳았고, 적은 숫자와 먼 촌수로 지내게 되었다. 우리는 자랐고, 어른이 되었고, 나이 차이는 많았고, ‘잘 산다’고 했고, 핑계도 없이 만남은 미뤄졌다.
짧게 슬퍼한다고 슬픔이 얕은건 아니라며, 그렇게 다시 미국으로 왔다. 부랴부랴 카톡방을 열고, 앞뒤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심심하기 짝이 없는 목적 없는 안부를 올려대며 미뤄뒀던 슬픔을 긴 시간으로 얇게 져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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